편견은 통계다
[2017년도 남아공 파견 시절에 적었던 일기임]
남아공에서 사는 게 기분 나쁜 이유는 참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흑인들의 낮은 성평등 의식이다.
여성을 대하는 이곳 사람들(특히 피부색 진한 사람들)의 무례함, 그리고 존중 받는 삶이 뭔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사는 수많은 (흑인) 여성들의 무감각함은 나의 분노 중추를 자극하는 여러 특성 중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나는 여태까지 진심으로, 오로지 피부색 진한 사람들한테서만 이런 기분 나쁜 경험을 했다.
1.
'캣콜링'은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겪어봤지만, 남아공에서 겪는 건 특히 더하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난 여기 사니까 이런 놈들을 만날 시간적 기회가 많다. 둘째, 내가 거주하고 일하는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므로 이들은 외국인이 (특히 나 같은 동양 여자는) 신기하다. 셋째, 내가 일하는 곳은 프레토리아에서도 제일 낙후되고 흑인 비율이 매.우. 높고, 범죄율은 당당히 1위를 달리는 지역이다. 당연히 교육 수준이든 문화 수준이든, 기대할 게 없는 곳이다.
학교는 메인캠, 서브메인캠 둘로 나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학교가 크고 으리으리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 쓰러져 가는 벽돌 건물 컴플렉스가 큰 게 하나, 더러운 길을 건너서 또 하나 있는 정도다. 메인캠에서 서브메인캠으로 이동할 때는 약 100~200m를 걸어 가야 한다. 이 짧은 거리는 온갖 과자 봉지와 쓰레기가 널려 있고, 군데군데 노점상, 불법 주정차한 택시들이 드문드문 포진하고 있다.
메인캠의 복사실에서 프린트할 게 있다든지, 교장과 미팅이 있다든지 하면 종종 이곳을 걸어가게 된다. 그 짧은 100~200m를 걸어가는 동안 수많은 소리를 들어봤다. "헤이, 칭총, 칭칭총, 싱숑샹섕숑, 칭총! 차이니즈!" 하는 인종 모욕적인 언사는 기본이요 ㅡ이건 나중에 또 썰을 풀어야 된다. 아오 ㅅㅂ놈들ㅡ "헤이, 뷰티풀! 헤이 레이디? 헤이!" 하는 '캣콜링의 교과서' 같은 사례, 핸드폰 번호 달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붙는 놈들, "두 유 웤 히얼?" 하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놈들 등등. 이런 일이 두 번 걸러 한 번 꼴로 매일 있다. 매일.
가끔도 아니고 이게 매일이면 익숙해지지 않냐고 할 미친x들이 있을까 싶지만, 매일매일 그저 무시하고 지나갈 뿐이지 나쁜 기분이 0이 된다든가, 즐겁게 웃으며 받아친다든가 할 수는 없는 거다. 이게 지속되면 오히려 나의 행동 패턴을 익혀서 범죄의 표적을 삼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요즘에는 이 짧은 거리를 굳이 차를 몰고 다닌다.
2.
남아공의 안전 수칙 중 하나가 "운전할 때 절대 창문 열지 마세요."다. 남녀 공통 해당사항이다. 강력범죄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문은 꼭 닫고 다니는데, 한국처럼 진한 선팅(!)이 일반적이지 않은 나라라서 대체로는 차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운전하며 도로를 달리면 옆 차선을 지나가는 남아공 택시(봉고택시) 안에 있는 놈들이 간혹 "차이니즈!" 하거나, 윙크를 날리기도 혹은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하는데 이 모든 행동은 모두 모욕적이다. "차이니즈!" 하는 건 남녀 공통이지만, 인종 불문하고 내가 남자였다면 그런 더러운 윙크, 더러운 시선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3.
생면부지의 남자 새끼들한테서 듣는 '캣콜링'을 제외하고도 할 말은 많다.
작년엔 직장 동료 한 명이 "겨울이 오는데, 밤에 춥지 않니? 여기서 남자친구 안 사귀니?" 이러는 거다. 추우면 난로나 라디에이터를 사야지 똥대가리야, 춥다고 남친 사귈 거면 날 더워지면 헤어져야겠네. 정말 기분 더러웠다.
4.
그리고 이건 한두 번 들은 질문이 아닌데, 남녀 불문, 직종 불문이다.
대뜸 "아이들은 몇이나 있어?" 묻는다. "아니, 결혼 안 했는데." 하면 돌아오는 질문이 가관이다.
"결혼 안 해도 애들은 다 있잖아?"
이 나라 흑인들은, 스물 넘은 여자는 당연히 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해댄다. 너네들은 결혼 전이든 후든 피임도 안 하고 그렇게 생각없는 관계들을 맺으니까 여자들이 스물 몇에도 다들 애가 줄줄이 소세지로 있지. 피임은 그렇게 안 하는데 다들 어찌나 사랑이 넘치셔서, 내가 일하는 학교에도 애 가졌다고 학교 안 나오는 애들이 반에 두 세명씩은 꼭 있더라. 하도 그런 애들이 많으니까 당연히 나이 스물 몇 되어서는 애가 둘은 있는 거지? (그런데 백인한테는 이런 '비약적인' 질문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5.
주말에 하이킹을 가끔 가는데, 어떤 인도계 남아공인과의 대화는 이랬다.
아재: "남아공 좋아? 남아공에 언제까지 있을 거니?"
나: "일단 2년이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남아공 좋아. 풍경도 날씨도 멋지고."
아재: "멋진 남자를 만나면? (음흉) 나는 여기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너 회계 쪽 학위 있니?"
이 대화의 문제점을 바로 알아채면 민감한 사람이다. 내가 남아공에 더 오래 있기로 결정하는 원인을 '남자'로 대뜸 한정지었다. 그리고 나한테 '학위'를 뜬금없이 물어본 것은 채용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해석되는데, 순서가 잘못됐다. 일단 내가 자기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닌가?
그리고 이 대화 풍경을 직접 목격한 사람만이 알겠지만, 이 인도계 남아공인 아저씨는 '자기 비즈니스에 내가 정말 필요해서' 학위에 대한 질문을 한 게 아니다. 그 대화 전반에서 느껴진 이 아저씨의 저의는 매우 불쾌했다. 그때 나의 불쾌함을 눈치챈 캐나다인 아저씨가 이 대화에서 나를 구제해줬다.
6.
아파트 단지에서 걸어가다 만난 어떤 흑인은 날 보자마자 "너 여기 사니?(응.) 난 몇 층에 사는데, 친구가 되지 않을래? 밤을 같이 보내면 즐거울 거야." 했다. 단박에 미친놈이라고 생각해서 "아니. 친구 안 하고 싶어." 하고 걸어들어왔는데, 저런 놈과 같은 동에 살고 있다니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7.
또 어느 날은, 현관을 열어두고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많은 1인용 아파트가 그렇듯이, 부엌 바로 앞에 1자형 주방이 있다. 대뜸 어디 사는지도 모르겠는 흑인 남자가 문앞에 서서 핸드폰 번호를 달라는데, 너무 깜짝 놀라서 그릇 깨뜨릴 뻔 했다. 뭐라뭐라 했는데 기억도 잘 안 난다.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하냐고, 정말 너무 싫다고, 가달라고 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 이후로는 현관문 열기가 정말 신경쓰였다.
8.
이사온 아파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요리를 하면 냄새도 잘 안 빠져나가고, 문 닫아놓으면 빨래도 잘 안 마르는 구조라서 문 앞에 빨래를 널어두고 말리는 중이었다.
옆집 사는 놈이 갑자기 와서는 자기한테 요리를 가르쳐 달라는 거다. 문앞에 초대도 안 한 흑인 남자가 우리집 세간살이를 훤히 들여다 보면서 서 있는 게 너무나 불쾌해서 "난 네가 거기 그렇게 서서 우리집 다 들여다 보고 있는 거 굉장히 불편하고, 나랑은 친구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현관을 거의 열지 않고 산다.
9.
굳이 나한테 직접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니더라도, 이곳 남자들은 여성을 예의 있게 대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여성들도 이런 언행에 굉장히 무감각하다.
학교에 동갑내기 흑인 여자 선생이 있다. 이름은 일단 A라고 한다. 예쁜 얼굴이라 미스 사우스 아프리카도 나가고 그랬단다. 한국인 동료한테 들은 얘긴데, 다같이 있던 자리에서 어떤 남자 선생이 "나 A랑 사귄다. 얘 뱃속에 내 아기 있어." 했단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A는 그놈이랑 사귀지 않는다는 것, 뱃속에 애가 있다는 건 구라라는 것.
그 얘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열이 확 뻗치며, "농담을 해도 정도가 있지, 그런 농담을 하나? 개념이 어디 박혀 있나?" 하고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찼는데, 막상 그 상황에선 A도, 그 주변의 모든 선생님들이 그걸 농담으로 웃으며 넘겼다는 거였다.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게 대단히 모욕적인 발언이란 걸 인식하지 못할까?
분명히 더 많은 일이 있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예정이지만 일일이 다 언급하기엔 의미가 없고, 무엇보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현장에 있었어야' 그 느낌을 제대로 안다. 글로만 적어 놓으면 "저게 왜 성희롱이야?" 하는 일이 참 많은 것이다. 그 때 그 시각, 그 장소, 그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더러운 그림자를 내 글솜씨로는 전달할 수 없어서 포기한 에피소드도 많다.
언급한 거의 모든 일은 '내가 남자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하루 걸러 한 번씩은 보고 듣는 모욕적인 언사들은, 남아공에서의 삶을 매우 '짜증나게' 만든다. 오늘 여기다가는 인종차별(조롱)적 발언은 적지 않았지만, 평소 내가 듣는 불쾌한 말들의 70%는 인종차별(조롱)적, 30%는 성희롱적/혹은 성평등에 무감각한 발언이다. 내가 직접 겪었든, 전해 들었든.
무례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사는 건 괴롭고 피곤하다. 내가 좀 다른 일로 남아공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좀 덜하겠지만, 남아공의 낙후된 지역에서, 교육 환경이 대단히 열악한 공립 학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무례하고 무식한 놈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다.
누가 남아공에서 사는 것, 일하는 것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난 '더럽다'고 한다. 글쎄, 내가 겪는 남아공이 좀더 멋지고 아름다우려면 직종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샌튼에서 비즈니스 컨설팅을 한다거나, 케이프타운에서 어학연수 온 학생으로 산다거나.
내가 만나는 남아공이 범죄로 악명높고 열악하기로 소문난 아트리지빌이라서, 남아공의 삶은 더럽고 괴롭고 피곤하다. 멋진 사람들 만나고 싶다. 좋은 나라 살고 싶다. 여행이라도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