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마음일기
평소에 나는 한국인으로서 전형적인 사고방식과 틀에 맞춰서 살아간다. 뭐, 굳이 한국인이라는 틀에서 보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 데이터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에 다녀온 호주 브리즈번 비행 역시 혼자서 여유 있게 즐기자는 마음으로 혼자 어슬렁거렸다. 다만 이번 브리즈번에 머무는 호텔은 처음으로 묵어보는 호텔인지라 기존에 갔던 루트가 아닌 다른 루트로 브리즈번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찾은 새로운 장소. 바로 브리즈번의 유명한 공원인 South bank 사우스뱅크였고, 나는 홀로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분명 브리즈번 도착 전에 찾아본 기온과 날씨는 여름이었는데, 호텔에 나와 사우스뱅크로 향하는 동안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 바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비 소식과 더불어서 은은하게 찬 기를 내뿜은 바람은 나를 당황시켰다. 일단 이렇게 나온 마당에 열심히 걸어가 보자 하고 종종종 걸어갔다. 그런 여정 와중에 가랑비는 굵어졌고 세찬 비가 하늘에서 내렸다. 순간 고민했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방향을 틀어서 우산을 살까? 아니면 호텔로 돌아가서 좀 있다가 나올까? 아니면 그냥 우산 없이 이 길을 쭉 걸어볼까?'
한참을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은 엄청난 갈등을 때리면서도 내 눈은 다른 사람들을 보느라 바빴다. 미리 우산을 편 채로 유유히 여유 넘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산 없이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걸어가는 사람들도 봤다. 아 어떡하지? 이 순간 내게 찾아온 고민은 마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수준의 고민이었다.
맨 처음 눈앞에 펼쳐진 횡단보도를 초록불에 맞춰 건넜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가자는 마음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내 건너온 길을 다시 초록불에 맞춰서 되돌아건넜다.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면서 걸어가 보자는 마음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한다는 나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서 이상하리만큼 그 순간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우산이 없어도 괜찮아, 그냥 이 비를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오롯이 맞아보면서 가보자는 용기가 샘솟았다.
세찬 비를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며 맞아가면서 사우스뱅크를 향해 갔다. 그러면서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을 봤다. 나처럼 우산이 없어도 여유 있게, 본인의 발걸음에 맞게 길을 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오히려 우산을 쓴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비가 와 흠뻑 젖으면서 일행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와 여유가 더 넘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 역시 사우스뱅크를 가는 내내 그리고 도착해서 예쁜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상하리만큼 혼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비를 우산 없이 맞으면서 여유 있게 걸어가 본 게 세상 언제 적이었지? 시원하면서도 춥다. 근데 이런 경험 나쁘지가 않다. 오히려 남들의 시선과 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느낌이라서 행복했다. 화장이 지워지고 앞머리가 비에 젖어 뭉쳐버려도 좋았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이랑 우산 없이 놀이터에서 노는 그런 추억도 물씬 났다. 그렇게 한국에서 온 비에 젖은 쥐는 여기저기를 알차게 돌아다녔다.
아, 우산이 없어서 슬펐던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못 먹었다는 것. 공원 한가운데에 서 있던 아이스크림 차에 시선이 꽂혔다. 다양한 맛이 있어서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우산이 없는 내게 아이스크림은 구름의 떡이었다. 우산만 있었으면 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돌아다녔을 텐데.. 그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가 자주 가는 한국 음식점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30분 내내 비가 와도 좋았다. 그냥 이 날씨에 걷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행복이었으니깐. 가는 내내 도착하게 되면 맛보게 될, 나의 젖은 온몸을 녹여주는 내 첫 끼가 될 뜨끈한 곱창전골에 밥을 생각하니 더더욱 이 가는 길이 재미나고 힘이 났다.
그렇게 도착해서 맛있게 밥을 먹은 뒤, 식당을 나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쏟아지던 비는 금세 그치고 햇볕만이 따사롭게 길을 비췄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요치로 향했다. 한국에는 요아정(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정석)이 있다면, 브리즈번에는 요치가 있다. 내 기준 요치가 더 맛있고 가격도 무게로 측정해서 더 저렴했다. 나는 요치를 사랑하고, 내가 브리즈번에 오는 이유가 바로 요치이다. 그렇게 요치에서 원하는 아이스크림과 토핑을 이것저것 추가해서 호텔로 돌아갔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 내내 생각했다. 오늘 되게 내게 있어서 굉장히 뿌듯하고 행복한 날이야라고 말이다.
예상치 못한 비에 흠뻑 젖었어도, 나는 정말 행복했다. 오늘만큼은, 나의 고정관념과 남들의 시선이 아닌 오로지 내가 하고픈 대로 즐기면서 마음을 따라간 날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