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못해 지루했던 사무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큰 소동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착한척 과장을 비롯한 간신 몇이 팀장을 데리고 나가면서 전면전이 허무하게 무산됐다.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에서도 막내는 남의 일인 양 조용히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일찍 들어갈래? 내가 얘기해 줄게' 간헐적인 마우스 딸깍 소리와 키보드 타자음, 몇 통의 업무전화가 오가는 중에 막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싫다는 답장을 받았다. 잘못한 것 없이 도망치는 모양새로 보이는 게 싫단다. 수군대는 분위기 때문에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닐 텐데 강심장이다. '술 한 잔 사주세요.' 뒤이어 메시지가 왔다. 하기 싫던 야근을 했어야 했는데 잘됐다. 핑계 낌에 술이나 마시기로 했다.
근처 돼지껍데기 집으로 향했다. 특별히 맛있지도 않고 서비스도 불친절해서 회사와 지척이지만 직원들에게 인기가 없다. 덕분에 누가 엿들을 걱정 없이 속 애기를 꺼내 놓을 수 있다.
소주를 두 잔 연거푸 마신 후 다시 잔을 채웠을 때, 막내가 입을 떼었다. 내막은 이랬다.
1월은 인사고과가 확정되는 달이다. 전년도 실적을 바탕으로 개인의 성적을 평가하는 시기. 우리 팀에는 세명의 신입사원이 있었고, 상대평가 원칙 상 셋이서 A, B, C 등급을 하나씩 나눠가져야 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본인이 C등급을 받게 되자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오갔다.
"왜 제가 C등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이 모두 잘해줘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어. 누가 못해서가 아니라 아주 조금 더 열심히 한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해 줘. 솔직히 말해서 신입 때는 인사고과 점수가 성과급이나 승진에 영향도없잖아. 그냥 기분만 조금 나쁜 거지."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뭐?"
"열심히 일하고도 제일 낮은 등급을 받은 기분, 그게 제일 문제란 말입니다!"
그렇게 면담이 끝났고 이후 내가 봤던 풍경이 펼쳐졌다.
"너는 회사가 합리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냐?" 잠시 뜸을 들이고 내가 물었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라고 규정을 정하고 체계를 만들고 교육을 시키는 거잖아요."
맞는 말이다. 그리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이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진 곳, 그게 회사다. 그러나 그것을 운영하는 과정 속에 사람이 투입되며 체계와 시스템이 유명무실해지기도 한다. 바른 사람이 운영한다면 철옹성처럼 튼튼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운영하면 구멍가게 보다 못해지는 곳이 회사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곳은 후자에 가까울 때가 많다.
솔직히 내 앞에 앉은 녀석이 억울하기도 하겠다. 가장 성실했고, 제일 부지런했다. 거기다 꼼꼼한 구석까지 있어서 대리와 과장들이 곧잘 데이터 정리와 같은 업무를 나눠줬다. 그러니까 업무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묻는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팀장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했고 술자리를 따라다니지 않았다. 다른 두 신입은 팀장을 비롯한 선배들에게 살살거리면서 회식 외 술자리도 자주 참석했다. 그간의 노고를 사수가 어필해 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의 사수는 자기 실적 어필하기에만 바빴다. 업무적으로 뛰어나지만 관계적으로 소외된 포지션. 그게 막내가 C등급을 받은 진짜 이유다.
"보통 신입사원에게는 성과라고 거창하게 부를 수 있을만한 업무가 맡겨지지 않아. 누군가의 부사수이거나 루틴 한 행정업무가 주어질 때가 많지. 그러니까 업무적으로 성과를 증명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기가 어려울 거야. 또 만약 네 평가등급이 변경되면, 상대평가 원칙 상 다른 누군가가 C를 받게 되겠지. 그 부담을 감수하면서 평가등급을 바꿔주진 않을 거다. 억울하겠지만 현실이야.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 회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는 네 자유지만 합리적일 거란 기대는 갖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우리가 하는 일에만 집중하자.
그리고 만약 누가 부추겨도 네가 그러고 싶지 않으면 팀장한테 사과하지 마. 너 잘못 없는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