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가끔 세탁기에 빨랫감을 집어넣을 때마다 이런 불평을 합니다. 큰 아이 예솔이의 바지 주머니에는 과자포장지나 부러진 장난감 조각 등이 으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난 아내의 그런 불평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빙그레 웃어 봅니다. 그건 예솔이에 대한 나의 끈질긴 교육이 이제 결실을 맺기 때문이지요.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나는 팔불출처럼 내 아들과 딸을 끔찍이도 사랑한다고 감히 말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다는 말이 수긍이 갈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큰 아이 예솔이가 이제 다섯 살이 되고 딸 예원이가 두 살이 되면서 우리 부부는 '부모'라는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들 철들면서 어른된 우리도 함께 철이 들게 된 셈이지요. 거의 날마다 보고 듣는 우리 사회의 슬픈 모습에 대해서 매번 깨닫는 게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의 병리가 많은 것은 학교 선생님들의 책임도 아니고 딱히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근본적으로 훌륭한 부모가 되려는 책임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훌륭한 아버지 상을 보여 줄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생각하며 내 모든 삶의 모습을 내 아들 딸이 본받고 있다는 일념으로 조심스럽게 살아갑니다.
일찍이 어느 책에서 읽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구절을 생활철학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경쟁 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남을 이기고 그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천천히 가더라도 반칙하지 않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이런 당연하고도 평범한 삶을 추구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양육시키는 게 내가 부모로서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좋은 생각과 생활습관을 몸소 보여주고 몸과 마음에 습관이 배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미새가 처음에는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먹이 잡는 방법을 가르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서투른 아이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씩 가르쳐 사람답게 만들어 가는 게 부모의 역할, 기쁨이 아닐까요?
이따금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 집 앞 근린공원에 다섯 살 난 예솔이를 데리고 놀러 가곤 합니다. 삭막한 동네 골목보다는 그래도 공원에 가면 살아있는 자연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공원이라는 이 작은 자연 속에서 가능하면 예솔이에게 생명의 눈을, 사랑의 눈을 가지도록 이야기해 줍니다. 고추잠자리를 잡았다가도 손가락에 끼워 잠시 구경하고 난 후에는 꼭 날려 보내도록 합니다. "잠자리를 오랫동안 잡아놓으면 잠자리 엄마가 슬퍼서 울 거야. 빨리 엄마에게 보내주자꾸나" 그러면 예솔이는 다섯 살의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자리를 날려 보냅니다. 또 공원에는 밤늦도록 사람들이 술 마시고 놀다 간 흔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깨진 병 조각도 있습니다. 모두 다 치울 순 없지만 예솔이와 둘이서 주위 쓰레기통에 조금의 쓰레기라도 주워 담으며 얘기를 나눕니다. "예솔아, 참 더럽지? 이렇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가면 나중에 공원 청소하시는 아저씨가 무척 힘드시겠다 그지? 우리는 이러지 말자." 그러면 예솔이는"아빠, 저는요, 내가 먹은 과자봉지를 집에 가서 버릴래요"라면서 바지 주머니에 과자봉지를 쏙 집어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솔이의 바지 주머니엔 으레 자질구레한 게 들어있게 되지요. 그 때문에 제 엄마의 불평을 듣기도 하는 거지요. 이제는 주머니의 쓰레기를 꺼내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연습도 해야겠네요.
그래도 난 예솔이가 먹고 난 과자봉지를 함부로 길거리에 버리지 않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살아있는 교육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 것인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예솔이가 몇 주 전에 있었던 공원에서의 이야기를 밤에 잠자리에서 내게 문득 물어봅니다. "아빠, 전에 우리가 살려 준 그 잠자리 말이에요, 엄마 찾아갔을까요?" "그럼, 엄마 잠자리랑 지금 나뭇잎 위에서 자고 있을 거야" "... 아빠, 우리 내일 아침에 공원에 가요" "왜?" "공원 청소 하시는 아저씨가 쓰레기 때문에 힘들 것 같아요. 우리가 좀 치워주러 가요" "... 으음, 그래.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자"
나는 속으로 놀랐습니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던 일들을 예솔이는 예사로 듣지 않고 잠재의식 속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르치면 요즘 우리가 부끄럽게 벌이고 있는 기초질서 지키기, 환경보호 캠페인이니 하는 것을 구차하게 벌이지 않아도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교육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지 머리 크고 난 후에는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집에서 가르치는 밥상머리 교육도 이 타이밍을 놓치면 그 후폭풍이 엄청날 겁니다. 우리 가정은 물론 학교, 사회, 직장 어디에서나 그 교육받지 못한 후유증을 감내하는데 드는 비용과 손실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내 자식을 '사람을 존중하고 예의 바른 인격체'로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그래서 예부터 자식농사가 제일 힘들다고 한 거지요. 그래도 우리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