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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삼이 집나갔다

[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이정록, 한겨레출판 ]


[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이정록, 한겨레출판 ]


무작정 걷는 것, 시를 쓰는 것.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의 8할은 제목 때문이다.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라니. 촌스러움이 세련됨보다 어울리는 내게 나지막한 오후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다가온 제목이었다. 

 [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는 내게 고 3 시절의 자신을 추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수능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지겨웠다. 그렇기에 부모님께 독서실을 간다는 발칙한 거짓말을 한 채, 나는 19년 인생 처음으로 조그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여행이란 바로 평소 매일 같이 탔지만 우리 집에서만 내렸던 '106번 버스'의 종점을 보는 것! 누군가는 참으로 귀엽고 소소한 일탈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쳇바퀴 속의 다람쥐와 같았던 내게는 나름 크나큰 도전이었다.

 내가 내린 곳은 종점은 아니었지만, 집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진 갑천 바로 앞의 정류장이었다. 그날의 햇살과 바람은 너무나 걷기에 아늑한 날씨였기에 나는 이 내천의 끝을 보고자 결심했다. (그때는 그것이 결코 무리임을 깨닫지 못했다……. ) 


 약 7시간 동안 나는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무작정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지면서 흐르는 물 덩이 덩이들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 도전의 끝은 온 발의 물집과 근육통과 함께 끝나고 말았지만, 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간이 지금 와서는 내게 행복을 떠올리게 하니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며 시를 쓴다는 것도, 무작정 걷는 행동과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록 시인은 다른 시인의 시들과 거기에 따라오는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또 재치 있게 써주었다. 그리고 [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의 가장 큰 재미와 감동은 마지막 6부의 천생 시인이자 화가인 그의 어머니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 내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시는 머리를 싸매고 골방에 틀어박힌다고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냥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일상 속에서, 우연히 반갑게 발견하는 징검다리와 같은 영감이 시인의 손을 거쳐 시가 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수많은 시인의 수만큼 시가 태어나는 방식도 다를 테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의 시이고, 나는 이렇게 시를 쓰는 것이 좋은 걸 어떡하겠는가. 아마 이정록 시인 역시 이 생각에 공감해 주지 않을까 하는 부끄러운 기대를 해본다. 시를 쓰는 게 괴로워질지도 모르는 훗날에 다시 한번 꺼내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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