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이슬란드 여행은 그야말로 예측불가다. 둘째 날 일정은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으로 가서 빙하 동굴과 옥빛 빙하를 볼 예정이었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통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은 꽃보다 청춘에 나왔던 곳으로 비취색이 나는 빙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해안가였다. 일단 다음날 일정을 당겨서 진행하고 통제되지 않은 곳까지 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날씨는 길이 왜 통제 됐는지 모를 만큼 맑고 청량했다. 우리는 솔헤이마요쿨로 이동했다. '요쿨'은 빙하라는 뜻으로 산에 있는 빙하와 빙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서 빙하를 보러 올라가는 길은 험난했다. 길이 가파르거나 걷기 불편한 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올라가는 길은 잘 정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의 길을 가로막은 건 다름 아닌 바람이었다. 빙산을 거쳐 내려오는 바람은 너무나 강했다. 게다가 바람에 얼음과 화산재가 섞여 얼굴을 때리니 제대로 앞을 보며 걸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전망대까지 갔지만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어 사진도 간신히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서둘러 내려와 버스에 올라탔지만 바람에 사정없이 맞은 두 뺨은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살면서 바람이 무섭다는 걸 처음 느껴서였는지 겨울에 아이슬란드 온 게 조금은 후회가 됐다.
그런데 빙하지대를 벗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이 사라졌다. 바람이 멈춘 아이슬란드는 다시 따뜻하게 여행객을 맞이해 줬다. 덕분에 우리는 별 탈 없이 웅장한 폭포를 보고 감탄할 수 있었고, 푸른 바다와 깎은 듯 멋진 주상절리 앞에서 인생샷을 찍을 수 있었다. 하루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가 조금 한심했다. 비록 무서운 바람과 함께 여행을 시작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여행지에서 후회라니.. 잠시나마 아이슬란드를 못 믿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아이슬란드는 역시나 멋진 곳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변화를 주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그렇게 먹고서는 오로라에 대한 욕심을 조금은 버리기로 했다. 너무 오로라를 기대했다가는 다시금 아이슬란드를 배신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이 되고 별이 어둠을 채우자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원래는 오로라를 찍기 위해 챙겨 왔지만 소식도 없는 오로라를 기다리느니 별이라도 찍어가자는 생각이었다. 아내 또한 오로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사진 찍는 중간에 별똥별도 보고 나름 별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해 들어가려는 순간 마침 밖에 나와 있었던 가이드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로라예요.' 나는 그 순간 기쁨보다는 아이슬란드를 향한 마음이 배신하지 않겠구나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는 삼각대를 놓고는 잠든 아내를 깨우러 방으로 달렸다. 나의 급한 목소리에 아내는 놀랄 시간도 없이 반사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선 나는 다시 삼각대가 있는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하지만 다큐나 예능에서 봤던 오로라는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건 초록색 커튼 물결이 하늘을 수놓는 그림이었지만 맨눈에는 그냥 뿌연 안개처럼 보였다. 아마 오로라라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게 오로라인 건가?라고 조금은 실망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역시나 아이슬란드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약 한 시간가량 계속된 오로라를 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서 다시 잠든 아내를 놔두고 사진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방향에 오로라가 나타났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진해서 이번에는 오로라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상상했던 오로라보다는 약했다. 그래도 약한 오로라라도 봤다는 것과 내가 직접 오로라 사진을 찍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만족감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오로라가 조금씩 희미해지자 더 이상 욕심 내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풍만해진 만족감에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대충 카메라를 정리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버틸 걸 그랬나 보다. 다음날 다른 일행에게 들으니 내가 잠든 시간즈음부터 진짜 영상으로 봤던 강도가 센 오로라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너무나 일찍 만족감을 채운 나 스스로에게 조금 안타까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 후회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약하든 강하든 난 오로라를 본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