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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llee Apr 13. 2023

밀당의 고수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여행기 3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아이슬란드에게 느낀 배신감을 아주 잘 표현할 수 있는 속담이다. 따뜻한 기후와 멋진 풍경 그리고 오로라까지 아이슬란드가 나의 여행을 반겨준다고 생각했다. 물론 잠깐이나마 의심했지만 그저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로라까지 보여준 아이슬란드는 다시금 냉정해졌다. 왠지 쓰고 보니까 나쁜 남자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절대 속단하면 안 됐다.

  전날 오로라를 봐서 그런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의 여행은 어제 길이 막혀 가지 못했던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을 가는 날이다. 다행히 길도 뚫려서 갈 수 있게 된 상황이라 오늘 하루 여행이 순조로우리라 믿었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 가기 전 빙하와 빙하 호수를 함께 볼 수 있는 스비나펠스요쿨에 먼저 들렸다. 어제와는 달리 빙하지역이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빙하를 보러 올라가는 길이 수월했다. 게다가 호수가 얼어서 빙하까지 가까이 갈 수 있어 만져볼 수 도 있었다. 빙하를 가까이서 보니 옥색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빙하를 느낀 뒤 주차장으로 하산했다. 내려오는 길에 바람이 조금씩 세게 불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아이슬란드는 나의 여행을 반겨주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환영은 여기까지였다.



  스비나펠스요쿨에서 스카프타페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점점 세게 불더니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스는 이런 날씨가 익숙한 듯 멈추지 않고 달렸다. 눈을 뚫고 달려 스비나펠스요쿨 근처까지 간 순간 우리 일행은 길가에 옆으로 전복되어 누워있는 버스를 보게 됐다. 바람에 넘어갔다고 설명을 들은 순간 강한 바람이 우리 버스를 강타했고 버스 뒷부분이 길 바깥쪽으로 밀려서 도로 밖으로 나갈 것 같았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아이슬란드 외곽을 도는 1번 국도는 갓길이란 게 없다. 길 바로 옆은 길보다 낮아서 조금이라도 바퀴가 나가면 바로 길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 아무래도 눈이 많이 오는 곳이다 보니 눈이 녹을 아 생기는 물이 바로 길 밖으로 빠질 수 있게 만든 듯했다. 그래서 눈이 많이 오는 날 길과 길 옆 낮은 부분이 구분이 안 돼 길 밖으로 빠지는 차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암튼 뒷부분이 밀리는 찰나에 버스에 있던 우리 일행은 아마 모두 아까 봤던 전복된 버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마치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반응들이 버스를 채웠다. 하지만 버스 기사는 그 상황이 익숙한 듯 마치 드리프트하 듯 유연하게 버스의 균현을 잡았다. 그 순간 기사를 향한 박수가 쏟아졌다. 바람이 심상치 않아 우리는 중간 휴게소에 들러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일반 승용차보다는 버스가 높고 바람에 맞는 면적이 커서 바람에 더 취약했기 때문이다. 휴게서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밖을 보니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바람의 위력을 겪은 우리는 여행보다는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레이캬비크로 복귀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어차피 오늘의 목적지는 빙하를 보는 건데 이미 오전에 빙하를 봤으니 본 걸로 치자고 서로 위로하면서 이날의 일정마치는 데 동의했다.

바람소리가 큽니다;;;


 일단 버스의 뒷자리에 여유 좌석을 마련했다. 아까 전복된 버스의 승객 중 안 다친 사람들을 픽업해서 좀 더 안전한 도시로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버스에 탑승객들은 대만 패키지여행팀으로 급한 환자는 구급차로 이송을 했지만 그 외 사람들은 근처 호텔에서 휴식 중이라고 해서 버스에 자리 여유가 있던 우리가 버스로 이동이 가능한 사람들을 태워서 레이캬비크로 가는 길에 태워주기로 했다. 버스에 타는 그들을 보면서 여행 중 만난 불행이 우리가 아닌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게 미안한 감정도 동시에 들었다. 바람에 다음 여행지를 못 간 게 운이 없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사고가 안 나서 무사한 게 행운이라는 복잡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복잡한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사이 바람은 더 강해져 복귀하는 우리 버스를 계속 괴롭혔기 때문이다. 겁에 질려 창문 밖도 못 보는 아내를 다독이느라 복잡한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우리 아내를 괴롭혔던 건 바로 소리였다. 바람은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속 적으로 드러냈다. 어느 정도 달려서 바닷가 근처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그곳에서 내가 본 풍경은 살면서 처음 본 풍경이었다. 파도가 바람 때문에 뒤로 밀리는 광경을 본 것이다. 다시금 아이슬란드의 바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버스 운전기사는 여유로웠다. 앞쪽에 앉아서 그가 운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요트 마스터 같았다.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서 조타 조종하듯 연신 핸들을 조종했다. 액셀을 밟아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듯 도로를 타고 가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켰다. 숙련된 기사 덕분에 우리는 안전하게 레이캬비크까지 복귀할 수 있었다. 그 동시에 우리는 오로라와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오늘부터 우리 출국날까지 아이슬란드는 계속 비 예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행히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어제의 충격 때문인지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오늘의 일정은 아이슬란드 서쪽 스나이펠스네스 반도를 여행하는 일정이다. 아이슬란드 하면 오로라 사진이 많이 뜨지만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에 있는 키르큐펠이라는 고깔모양의 산도 사진에 많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사진은 키르큐펠 산에 오로라가 걸쳐 있는 사진일 것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씨라 불안했다. 역시나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큰 기대감 없이 출발했지만 이날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풍경 중 가장 멋진 풍경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일정표에는 있지 않았던 곳으로 어제 취소된 일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가이드가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가는 길에 점심도 먹을 겸 잠깐 들린 곳으로 '흐라운포스'라는 폭포였다. 이미 폭포는 많이 봤기에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을 가졌지만 산책로를 따라가다 본 폭포는 아이슬란드에서 본 폭포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옆으로 길게 절벽 중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포로 개인적으로 크로아티아에서 간 플리트비체보다 더 감명 깊었다. 게다가 물색은 빙하가 녹아내리는 물인 걸 증명이라도 하듯 특유의 푸른빛을 품고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또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르면서 만든 절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까지 본 폭포는 높고 크고 거대한 것이었다면 이번에 본 풍경은 세밀하고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웅장하지 않아도 멋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어제 자신이 부린 심술을 보상이라도 하듯 아이슬란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를 위로해 줬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오늘의 목적지인 키르큐펠 산으로 향했다.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지독한 변덕쟁이다. 우리는 키르큐펠 아랫마을까지 갔지만 결국 보지 못하고 차를 돌려야 했다. 이번에 우리 발목을 잡은 건 바로 눈이었다. 눈이 갑자기 쏟아지더니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는 길에 보인다는 산도 눈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눈 때문에 숙소로 복귀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에 우리는 다시금 목적지를 포기해야 했다. 다시 레이캬비크로 복귀하는 길에 길 옆으로 빠진 승용차를 두 세대는 본 것 같았다. 이제는 거의 무덤덤해졌다. 확실히 어제의 경험이 예방주사가 됐나 보다.

 멋진 폭포를 본 것에 만족해야 만 했던 하루였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마지막 여행 날까지 비라니. 긴 시간을 날아와 겨우 만났는데 처음에는 잘해주더니 뒤로 갈수록 너무 심술을 부리는 아이슬란드에게 너무 서운했다. 밀당을 잘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변덕쟁이인지 모르겠다. 아침에 수영복을 챙겨 나갔다. 이 추운 날 웬 수영복이랴 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슬란드에서 제일 유명한 스파인 '블루라군'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열발전을 하고 남은 온수에 바닷물을 섞은 곳으로 푸른색을 띠고 있어 블루라군이라고 부른다. 실망감 때문인지 아니면 허탈감 때문인지 역시나 흥이 나지 않는 하루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블루라군은 따뜻하게 우리를 위로해 줬다. 꽤 넓어 탁 트인 느낌도 났고 물의 온도도 몸을 담그고 즐기기에 적당했다. 무엇보다 차가운 공기 덕분에 스파는 더 포근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물색은 오묘했다. 빙하수에서 봤던 푸른빛에 몸을 담그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서운한 게 있으면 이곳에서 다 풀고 가라는 아이슬란드의 마지막 배려인 듯했다.

  아이슬란드는 변덕쟁이가 아니라 밀당의 고수임이 틀림없다. 여행 첫날부터 가이드가 강조했던 말이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두 번 와야 합니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여름과 겨울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아이슬란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아이슬란드의 변덕은 아마 여름에 다시 만나길 희망하는 바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채 여행을 마무리했다. 아이슬란드는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갈 거라는 아내가 창 밖을 보면서 무심코 아이슬란드를 그리워하는 말을 내뱉은 건 그런 아이슬란드의 바램이 조금은 우리에게 깃든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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