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혼자로 시작해 우리가 되는 여행
아이 없이 떠나는 혼자여행. 내가 이 여행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것은 책방 방문이었다. 가족여행 속에서도 서점을 찾기는 하지만 훑듯이 지날 뿐, 진득이 내 책을 읽고 오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오늘은 책 속에 퐁당 빠져버리는 호사를 누리기에 참으로 완벽한 날이다.
제주해변과 그 주변을 거닐다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일정을 구상했다. 하지만 어떠한 비장한 계획도 늘 틀어지기 일쑤인 것이 여행 아니던가. 나는 오후께 방문한 해변 어느 갤러리의 그림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오후 여섯 시면 하나둘씩 문을 닫는 제주이거늘. 시계를 차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다 보니 어느새 다섯 시가 넘어버렸다. 흐린 겨울이라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으려는 모양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점찍어둔 서점 방문을 포기해야.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내두른다. 오랫동안 읽고 오지는 못하더라도 책이라도 사가야지 라는 마음으로 서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독립서점이었다. 붉은색 벽돌 건물에 호젓이 자리한 모습이 요즘 유행하는 소설책 표지 속 어느 곳 같다. 휘몰아치는 제주바람을 등지고 서점 문을 열었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온기가 감싸준다. 안과 밖의 온도차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자그마한 공간에 꾹꾹 눌러 담은 듯한 사장님 취향. 그분과 내가 일치하는 지점이 어디일까 더듬어가며 책을 고르는데 자꾸만 귓가에 화기애애한 대화 소리가 꽂힌다. 카운터 옆 한 켠의 작은 테이블에서는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과 젊은 여자가 조촐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싶었기에 그 말소리를 무시하려 애썼다. 손님 있을 때 대화하지 말라고 교육하던 나의 지난 오프라인 매장 운영시절을 떠올리며 '여기는 손님은 안중에도 없는 거 보니 글렀군’이라고 홀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대화 가운데 스텝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여자가 여행자라는 사실을 추측케 하는 내용이 오갔다. 여기는 손님이 안중에도 없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손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음.. 그렇다면 나도?' 이런저런 생각과 뒤섞여 잘 고른 건지 모를 두 권의 책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계산을 위해 처음 마주한 사장님과 나.
"마감 때까지 잠깐 읽다 가도 될까요?"
"물론 되죠. 혼자 오셨어요?"
"네. 아기 엄마인데 생일이라 혼자 여행 왔어요."
"어머 정말요? 가만있어보자. 그러면 이럴 때가 아니지. 선물을 좀 챙겨드려야지."
갑자기 사장님의 손이 분주해졌다. 어디서 이것저것 자그마한 것들을 꺼내와 선물이라며 챙겨주신다.
“특별한 날인데 같이 앉아서 한 잔 하실래요?"
그녀는 와인잔이 올려진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는 책만 읽고 가는 시나리오였는데 이 어설픈 듯 사랑스러운 분의 호의가 싫지 않았다.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의자를 끌어와 그 작은 테이블에 합석했다. 부산스레 냉장고를 뒤지던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자자. 그러면 제가 술을 사 올게요."
잔만 하나 꺼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사장님은 손님으로 온 여행자 둘에게 가게를 맡기고 홀연히 나가버렸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 남겨진 여자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 사이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셔서 어쩔 줄 몰라 또 한 번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점 맞은편 게스트하우스 스텝이라는 여행자 아가씨는 매번 조용히 책만 읽고 가다가 오늘 처음으로 사장님과 말을 섞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새 이곳에 앉아있다며. 책과 여러 독립서점에 대해 열렬히 이야기 나누고 있어 당연히 함께 일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그저 책을 좋아하는 순수한 아가씨였다. 서점에 왔다가 모인 사람이다 보니 다양한 주제로 오가는 대화 속에 한 번씩 책 이야기 섞인다. 그때마다 사장님과 여행자 아가씨의 눈빛이 빛난다. 나도 책을 좋아하지만 이 사람들 책에 진심이구나 싶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벼운 토크 속에서도 그들이 골라내 사용하는 단어에는 힘이 있었다. 그들이 만난 책에서 건져진 단어이리라. 아. 여기가 외국이 아니고 한국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민감한 언어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함께 서점을 마감한 후 편의점에서 간단한 안주를 사들고 사장님 집으로 향했다. 서점에서 계단만 오르면 바로 나타나는 곳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4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층고에 거친 에폭시 바닥을 한 공간을 마주하고 여행자 아가씨와 나는 놀랐다. 으레 상상한 집의 모습이 아니었다. 구겨진 맥주캔과 담배꽁초가 올려져 있는 거실 테이블 뒤로는 LP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마저도 집 같지 않은 모양새다. 어느 대형 LP 바에 온듯한 착각 속에 우리는 새로운 맥주 캔을 땄다. ‘이 멋진 사장님. 도대체 정체가 뭐지?’
여행에 관한 생각과 여행 속 에피소드를 나눕니다
<수상한 서점> 편은 다음 포스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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