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좋아서 바람결이 좋아서 서둘러 산책을 나섰다. 전날 내린 비로 짙은 구름이 맞은편 아파트 옥상 피뢰침에 걸릴 듯 낮게 드리워져 있다. 건너편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면 구름빵 반죽이 한 웅큼 잡힐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저 산 너머 건너마을까지 가면 무지개 끝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어린 날의 마음처럼.
한참을 걷고도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공원 벤치에 앉아 땀을 식히며 라디오를 듣다 가야지 생각했다. 해 질 녘이면 내 주방의 배경음악으로 퍼지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란 프로그램을 야외에서 라디오 앱으로 들으려 했는데 앱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배경화면에 잘 보이게 놔두었었는데. 언제부터 챗지피티와 인스타그램, 브런치 앱에 밀려 라이프 스타일이란 폴더 안쪽에 비활성화 상태로 있었는지. 숨어있던 앱을 찾아 활성화시키고 업데이트까지 마치고서야 볼륨을 낮춰 풀벌레 소리와 함께 듣는다.
사용하지 않는데 혹시나 해서 삭제하지 않고 구석 어딘가에 남겨둔 앱, 안전드림, 피싱아이즈. 만날 일 없고 연락할 일 없는데 혹시나 하는 아쉬운 마음에 지우지 않는 옛 직장 상사의 연락처 같다.
반토막 난 주식, 들어가지도 않고 반려주식으로 남겨놓은 증권사 앱은 알고 싶지 않은 옛사랑의 소셜 미디어 같다. 한 번씩 생각나지만 앞으로도 애써 찾아보려 하지 않을 그런.
한 달에 한번 신용카드값이 훅 빠져나가면 잊고 있다가 체크카드 잔고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가는 주거래 은행 앱은 가족 마냥 무심하게도 뜨문뜨문 들여다보게 된다. 든든한 정기예금 잔고처럼 언제고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 같은 믿음 때문에.
매일 아침 오늘의 점식 급식 메뉴를 알리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울리는 학교종이 앱은 넋 놓고 시간을 보내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알람이다. 어서 아침 해 먹여 애들 학교 보내야지, 애들 하교 시간이네, 보고 있던 유튜브 얼른 끄고 책이라도 펼쳐 라며 나를 채근한다.
매일 안 들어가면 서운한 쿠팡앱은 단톡방에 있는 지인들 같고 일 년에 한 번 봉인해제되는 여행앱 폴더는 일 년에 한 번은 꼭 봐야 하는 멀리 사는 단짝 친구 같고, 거의 들어가지 않지만 여전히 첫 화면에 조용히 자리한 시요일앱은 누구와 같을까... 가을이면 생각 나는 그때 그 사람인가. 지우지 않고 뭐 하나쯤은 그저 휑한 내 마음에 소리 없이 간직하고 싶던, 이제는 퇴색되어 나 스스로 윤색해 버린 어떤 기억의 한 귀퉁이.
연락하지 않고 거추장스레 갖고 있는 옛 직장 거래처 사장님의 연락처처럼 있는지 몰랐던 앱을 지우고 핸드폰 저장공간을 조금이라도 비워내는 가을이었으면 싶다. 겨울이 오기 전에 잎을 떨구어내는 나무들처럼 움켜쥔 인연을 지켜내기 위해 털어내는 인연 또한 필요하겠지. 이 가을엔 조금 더 홀가분해지자. 인연의 낙엽을 떨구듯 안 쓰는 앱을 과감히 삭제해 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늘의 끝 음악 헨델의 라르고를 들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