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마다 지침이나 매뉴얼이 있다. 나라에 법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법, 규정, 규칙, 지침 등을 통칭해서 '매뉴얼'이라고 칭하겠다. 우리는 신기한 세계에 살고 있다. 매년 매뉴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나라에 모르는 법이 일 년에 수 백 개씩 만들어진다. 회사마다 매뉴얼이 수 십 개씩 만들어지고 계속 조항이 늘어난다.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될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일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매뉴얼이 중요하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실수를 줄여준다. 일에 있어 결과의 질을 일정하게 보장해 준다. 구성원 간에 매뉴얼에 따르도록 하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만든다. 일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평도 줄어든다. 그런 장점들이 많아서 그런지 국가시스템이나 회사시스템에서 매년 매뉴얼을 만들고 그것을 리뉴얼한다. 매년 내용이 많아진다.
이런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단점들이 많이 보인다.
로펌에서도 당연히 기본 매뉴얼은 갖고 있다. 법에서 지켜야 되는 제출기간이 있어 실수하면 자칫 큰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수하면 되돌릴 수 없는 업무가 많다. 그런 기본사항에 대한 매뉴얼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 로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그 원인을 찾아보는데 매뉴얼 숙지는 다들 잘 돼 있다. 그런데 업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아무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 어떤 조치를 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다시 그런 일만 발생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매뉴얼대로 했는데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사고가 났을 때 매뉴얼 뒤로 숨는 현상이 발생했다. 매뉴얼이 없다면 다 함께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서로 협업이 잘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매뉴얼의 세분화로 책임분야가 명확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 일만 관심을 둔다. 남 일에 관심이 없어진다.
매뉴얼은 업무의 기본이고 나머지는 사람의 관심과 정성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뉴얼은 업무의 최대한이 되고 만다. 매뉴얼에 없는 일은 내 일이 아닌 것이 된다. 내가 이 조직의 필수요원으로서 일에서 오는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매뉴얼 때문이다.
판사, 검사, 경찰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밖에 처리를 못했습니까?"라는 민원성 항의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매뉴얼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뭐 위반한 게 있나요?" 대답이 이렇게 되면 할 말이 없어진다.
매뉴얼에 의존하는 순간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남의 일이 된다. 업무에 대한 기계적 일처리 밖에 안된다. AI 시대에 대체되기 딱 십상인 직업이 된다. 연민과 공감은 AI가 흉내내기 어려운 영역이다.
로펌에서도 매뉴얼은 잘 모를 때 찾아보는 정도의 보조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나머지는 의뢰인을 내 가족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 실수가 없어진다. 의뢰인도 믿음을 보내온다.
로펌에서 그런 큰 실수가 발생한 이후에 매뉴얼을 강화해서 책임을 더 엄격히 하자는 견해가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매뉴얼이 자세히 될수록 직원들은 매뉴얼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직관을 발휘할 때마저도 매뉴얼을 찾고 있을 거다. 매뉴얼은 책임회피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매뉴얼은 자꾸 허점을 메꾸기 위해 두꺼워진다. 직원들 간의 협력관계나 신뢰관계는 희미해져 간다. 매뉴얼이 두꺼워진다는 것은 회사가 망해간다는 신호다.
우리 사회도 법과 매뉴얼이 매년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진다. 정치인들 간, 국민들 간, 직업 간 신뢰관계가 많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다. 공무원들은 그 법과 매뉴얼 뒤에 숨어서 기계적으로 정해진 업무만 처리한다. 민원인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은 옅어진다.
매뉴얼에만 따르면 일단 책임을 면할 수 있다. 잘하면 워라밸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일에서 보람을 찾거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긴 어렵다. 그저 무난한 회사생활이 된다. 매뉴얼이 두꺼워질수록 조직이나 개인의 성장은 멀어진다.
매스컴에서 나오는 감동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은 매뉴얼을 벗어나 행동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 공감하는 마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마음은 매뉴얼화하기 힘들다.
주위를 보면 타인의 행동에 공감하면서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찾아주려고 진심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무언가가 있다. 공감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 변화를 가져오는 그것. '용기'다.
법조인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우선은 전문가에 걸맞은 최선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나와 타인의 삶을 가치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공감과 용기임을 새삼 느낀다.
지리산(그림판그림) by INNER S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