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벅선생 Jan 03. 2024

우울증에 걸렸다

우울증의 결정적 증거

아침마다 나는 차로 40분 거리를 운전해 출근했다. 싼 전세 보증금을 찾아 회사에서 먼, 동시에 시댁과 같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이 문을 여는 9시까지 아침 시간 아이를 봐주기 위해 동네 이모님이자 시어머니의 친구분이 초인종을 누르면 환한 웃음으로 맞이한 다음, (보육 서비스에 대한 돈을 지불하면서도) 아직 너무 어린 아기를 남의 손에 맡긴다는 사실 그 자체로 대역죄인이 되어 고개를 연신 숙이며 뒷걸음질 쳐 집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또 나의 것이 아닌 밝은 웃음으로 표정을 위장하고 직장 상사들을 대해야 했으므로 차에서 보내는 40분만이 그냥 내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고 그 40분 동안 나는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생이 이대로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 된 사람이 어린 아기를 두고 스스로 죽어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책임감 없는 짓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실수로 나의 목숨을 끊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교통사고가 나서 이대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게 힘들다면 목을 매는 아픔을 참을 수 있는지 다시 시도해 봐야 하나? 죽고 싶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이 고통을 끝내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수많은 40분들을 보냈다.


그보다 어릴 때 언젠가 한 번은 자살을 실제로 시도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회사 근처 원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었는데, 나를 죽이고 싶어서 담배를 마구 피워대기도 했다. 담배를 잘 피우지도 못하면서 죽고 싶은 날이면 서랍 속에 감춰두었던 담배와 라이터를 가지고 아무도 없는 건물 옥상 구석에 숨어 담배 3~4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남은 삶을 조금씩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그러다 그걸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된 어느 날 밤, 수건걸이에 끈을 매달아 목을 걸었다. 그런데 결연했던 의지와 달리, 생각했던 것보다 목을 조여 오는 고통이 너무 아팠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목이 아파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죽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는 것도 사는 것만큼 어렵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그래서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는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타인의 과실에 의한 교통사고로 즉사하기를 꿈꿨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죽어야 할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죽고야 싶지만 인위적으로 빨리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사는 만큼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고, 선택권이 있다면 오래 살고 싶다. 그런데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한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죽고 싶었다. 우울증 환자들의 죽고 싶다는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 우울증도 아니면서 협박의 용도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지만 우울증 환자들의 죽고 싶다는 말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로 이상한 생각이다(종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논외로 하겠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은 뇌의 어딘가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본능에 반하는 것이고 설계된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걸 몰랐다. 사람들이 모두 가끔 한 번씩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로 알았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죽고 싶다고 말하는 등장인물을 가끔 본 것 같아서 이상하지 않은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죽고 싶지 않다. 또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먹고 잠을 자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실 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스스로 먹는 것을 멈춘다! 먹는 것을 멈춘다는 것은 죽음의 전조 증상이다.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아기가 있다는 것은 힘든 마음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상황을 조장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껏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으면서도 실제로 자살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는 없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꾸역꾸역 살아갔다. 남들 앞에서는 멀쩡한 척 연기를 했지만 방치된 고장은 결코 저절로 고쳐지지 않았고 계속 악화되어서 결국에는 불면증과 거식증이 찾아왔고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들과 밥을 거의 먹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머리카락이 한 무더기씩 빠져 원형 탈모가 오고 한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빠져 거의 산 송장 같은 모습이 되었을 때에야 나는 비로소 병원에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부터 나는 다시 조금씩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에 나는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세 가지를 물었다. "죽고 싶어?" "밤에 잠은 잘 자?" "밥은 잘 먹어?" 그 세 가지가 우울증의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밤에 잠을 못 자고, 밥을 먹고 싶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면 즉시 병원에 가기를 권한다.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이 나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