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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벅선생 Jan 07. 2024

엄마 미안해

우울증의 악화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어린 시절, 가족과 어디를 놀러 간다거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티브이는 언제나 아빠 차지였고 나랑 놀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너무나 심심한 나머지 시작한 것이 공부와 독서였다. 심심할 때면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았고, 방학에는 선생님이 감사하게도 따로 챙겨 주신 교사용 문제집들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 말고는 다른 재미있는 게 뭐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딱히 불만도 없었다.


엄마는 한 번도 내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공부를 잘해 상을 받아오면 엄마가 좋아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고무된 나는 "엄마, 나는 나중에 크면 꼭 성공을 해서 엄마를 호강시켜 줄 거야. 정말 좋은 집에서 엄마랑 행복하게 살 거야, 두고 봐." 장담하기도 했다. 엄마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어쩌면 고된 인생 속에서 딸에게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커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대학을 중퇴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앞길이 막막했지만, 그 무렵 공적 부문에서부터 먼저 채용에 학력 차별이 없어지기 시작했으므로 공무원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1년 간 공부한 끝에 9급 서울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서울로 상경해 공무원 생활을 했다. 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심지어 매달 빚을 갚아나가면서 서울에서 월세살이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내게는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서울살이의 팍팍함과 돈 없는 설움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더 많은 월급을 받는 회사로 이직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직을 준비하는 동안 빚을 연체하지 않고 상환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몇 년간의 공무원 생활 동안 돈을 최대로 모아야 했다. 목표한 돈이 모였을 때 퇴사를 하고 1년 넘게 수험생활을 한 끝에 공기업에 다시 취직할 수 있었다. 공기업에 취직해서는 그래도 돈을 꽤 많이 벌었다. 어느새 빚도 다 상환하고, 차도 사고, 엄마에게 용돈도 드릴 수 있었다. 한동안은 우울하지 않았다.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나는 남편과 번갈아 육아휴직을 하기도 하고 동네 이모님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나의 야근을 둘러싸고 부부간에 갈등이 너무 깊어졌기 때문에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무렵엔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집에 남겨 두고 내가 사는 지방으로 내려와 내가 회사를 간 사이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조금은 마음 놓고 회사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두 달쯤 지났을 때부터 밤마다 엄마 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기침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후 알게 된 사실은 엄마의 유방암이 10년 만에 재발해 폐에까지 전이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전이가 심해 수술도 할 수 없고 당장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내 아이를 돌봐주다가 엄마가 그렇게 된 것만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호강시켜 주기는커녕 제배로 낳은 아이도 어쩌질 못해서 연고도 없는 곳에 엄마를 데려다 놓고 저녁 늦게까지 아이나 보게 해서 엄마가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엄마의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버린 것이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나는 왜 엄마가 밤마다 기침을 했는데도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그 후회와 슬픔과 한탄이 다시 우울증으로 왔다. 일단 아이와 엄마를 보살펴야 했기에 휴직을 했다. 휴직계를 낼 때 나는 이미 회사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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