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벅선생 Jan 21. 2024

내 책임이라는 생각

마음의 짐을 덜다

어느 날, 어 선생님이 물었다.

"어떤 게 가장 힘드세요?"

"엄마가 아프신 거요. 엄마가 돌아가실까 봐 무서워요. 그렇게 되면 슬픔과 죄책감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엄마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그리고 제 삶만으로도 너무 버거운데, 엄마 치료에 대해서도 고민할 게 많아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어요."


엄마는 몇 달 전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았고 암세포가 폐와 뼈 등 다른 부위로 이미 전이된 상태여서 수술할 수 없고,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 정신 상태도 만큼 더 위태로웠다. 휘청대는 마음 때문에 하루하루를 줄타기하듯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원래부터도 나는 엄마가 혹시나 먼저 돌아가시면 그 슬픔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엄마가 없으면 나를 온전히 사랑해 줄 사람도 없을 것 같고, 그런 세상을 상상만 해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종종 나는 '다른 시련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엄마가 혹시나 먼저 돌아가시면 그것만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나의 삶은 무너지고 말 거야.'라고 생각했었다(나는 엄마를 걱정했던 걸까 엄마 없이 남겨질 나를 걱정했던 걸까).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이 닥치니 우울하지 않기가 어려웠고 지방에서 어린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 엄마를 서울 병원에 데려가고 케어하는 일 쉽지 않았다.

나는 어 선생님이 내가 처해 있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헤아려 위로의 말을 해 주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 선생님은 대신 이렇게 물어왔다. "엄마가 아프신데 왜 행벅씨가 힘들죠? 행벅씨가 힘들어서 달라질 게 있나요?"

나는 당황스러워 얼마간 머뭇대다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된 거 같... 제가 책임져야 하는데... 여러 가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마음도 힘들고 몸도 힘들어요."

"왜 행벅씨가 엄마를 책임져야 하죠? 행벅씨 말대로 누군가 엄마를 책임져야 한다면, 엄마를 가장 책임져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

"만약 행벅씨가 아프다면 행벅씨 아이가 행벅씨를 책임져야 하나?"

"제가 아프면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 같아요."

"네. 엄마가 아픈 것은 일차적으로 엄마가 해결할 문제죠."

"네???"

"그러면 두 번째로 엄마를 책임질 사람은 누구죠?"

"음...... 아빠요?"

"네, 맞아요. 그다음은요? 행벅 씨, 언니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언니는 근데... 아이가 어려요."

"행벅씨 아이는 안 어린가요?"

"아... 그렇긴 한데... 언니는 아이 키우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해요..."

"글쎄요, 엄마, 아빠, 언니, 그다음이 행벅씨 책임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 아니... 우리 집은 그렇지가 않아요... 현실적으로 제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왜죠?"

"엄마 스스로 해결하긴 어렵고, 아빠나 언니는 그렇게 엄마를 챙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왜 그렇죠? 세 사람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엄마, 아빠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차도 없고 돈도 없고 인터넷 검색도 잘 못하고요. 아빠가 병원 같은 걸 알아보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언니는 좀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행벅 씨?"

"아... 그게 아니라... 그동안 집에 일이 생기면 늘 제가 나서서 해결을 해왔어요. 제가 나서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예요."

"그럴까요? 그건 행벅씨가 그동안 그 일자처해서 다 떠맡았기 때문이. 행벅씨가 없으면 그 세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요? 아니요. 행벅씨가 그 일을 떠맡지 않으면 엄마, 아빠, 언니가 스스로 그 일을 할 겁니다."

"아........"


어 선생님과의 그 짧은 대화는 나에게 너무나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고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는 항상 나에게 자연스럽게 도움을 구했고, 언니는 항상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행벅이 네가 똑똑하니까... 네가 알아봐. 나는 잘 몰라..."

나는 이제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상담실을 나와서도 한동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당연히 자식인 내가 엄마를 책임져야 하는데, 왜 아니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한 이틀 정도 지나서부터 서서히 아주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갔다. '아, 그 일들이 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 아니었구나.'

어 선생님과의 그 짧은 대화가 나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얼마나 나를 놀라게 했는지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가 아픈 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 엄마가 회복하도록 보살피는 것도 나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 부모님을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나는 그들의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이었는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대화는 이후의 나의 삶과 정신 건강 회복 큰 영향을 미쳤다. '깨달음'은 우울증을 치유한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미안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