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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임 Nov 04. 2024

위대한 가성비

궁상이라 하지 말아 줘요. 가심비도 챙기니까

군 제대와 동시에 취업과 결혼까지, 교과서다운 삶을 충실히 살아온 내 남편은 16년 차 직장인으로 성실한 월급쟁이이다. 늘 퇴사를 열망하지만 돈 불리는데 1도 재능 없는 우리 부부는 월급이라는 한정된 자원으로 알뜰하게 쪼개 쓰며 한 달 한 달 살아간다. 월급은 손에 움켜쥔 모래알이어서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조금씩 모아두는 종잣돈은 전세계약 갱신금으로 훌훌, 굵직한 경조사로 훌훌, 그래도 마통 없는 삶이라 자조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이다.


자본주의를 사랑하는 부인은 요리조리 틈새 알바로 가정경제에 이바지하는 중이며, 최대한 싸고 저렴하게, 가성비와 가심비를 추구하는 우리 부부 위대한 가성비주의자라 하겠다. 여행 갈 때, 마트 갈 때, 인터넷쇼핑을 할 때, 하다못해 가성비의 끝판왕인 다이소에서 조차 1000원짜리 아크릴수세미와 2000원의 두툼한 수세미를 두고 고민한다. 몸소 실천하는 현실 재테크, 가성비 우선주의 삶이란 대충 이렇다. 



그 돈이면 저가항공으로 두 번 가지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국적기 여행은 저 옛날 허니문과 최근 마일리지로 다녀온 발리 여행 두 번뿐이다. 우리는 일단 저렴하게 가는 게 목표이니 언제나 저가항공이 필수다. 185센티미터 장신의 남편과 아들은 기내 앞 좌석에게 무릎을 희생당하고, 잠이 고픈 딸내미는 고개가 연신 곤두박질친다. 엄마는 그나마 형편이 낫지만 허리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연착의 불안함과 일절 없는 서비스, 뒤로 젖히기 미안한 의자를 기억하면 다음엔 꼭 국적기를 타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이 돈이면 두 번을 가지'의 마음으로 여름휴가와 겨울방학을 대비해 홀리듯 탑승권을 검색한다. 물론 저가 항공으로. 최근 대한항공을 처음 타 본 딸이 기내 어린이 선물과 헤드셋을 받아 들고 기내식을 먹으며 감격할 땐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우리는 2월에 방콕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에어아시아.

여행할 땐 저가 어때♪♩



묶음상품, 원쁠원. 용량대비 가격 췍

아이가 어렸을 땐 한살림, 초록마을에 들락날락했던 나다. 감사하게도 아토피나 알레르기 없이 잘 커주었지만, 무섭게 먹어대니 점차 그 양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유기농우유, 국산콩나물과 두부, 유정란, 프리미엄어묵을 고르고 싶지만 언제나 손에 잡히는 것은 가성비 상품들. PB 우유, 수입산 콩나물과 두부, 무항생제면 족한 계란, 그냥 가격대비 양만 많으면 된다. 가끔 날짜 임박한 상품을 50퍼센트 할인가로 구입할 때의 뿌듯함이란. 어느 날은 욕심내어 좀 더 육질 좋은 소시지를 집어 들어 보지만, 저쪽에서 남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묶음상품 세일 소시지를 들고 오는 중이다.

역시 나보다 절약이 체질☞☜ 


알리알리 알리신이시여

인터넷쇼핑은 이제 알리와 테무의 등장으로 평정되었다. 핫딜을 찾을 필요 없이 최저가라 하기 미안할 만큼의 가격들이 난무한다.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인 데다 상품 선별에 인내와 꾸준함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불편은 기꺼이 감수한다. 남편의 쇼핑중독은 여름에 피크를 찍은 후 이제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20kg 쌀을 3만 원에, 찰옥수수 30개도 15000원에 구입하며 무척 신나 하던 자부심이란 저 멀리 쏘아 올린 공이었다.

그 뒤로 각종 생활용품을 무척 저렴하게 사들였는데 물론 늘 성공적이진 않았다. 9천 원짜리 와이드핏 데님을 주문했는데 댕강한 바지가 와서 버리려다 아들에게 입혀보니 요즘 나름 핫한 버뮤다팬츠가 되었다. 3천 원짜리 트레이닝 반바지는 터무니없이 작은 게 와서 초등 딸아이의 잠옷 바지로 탈바꿈. 요즘은 가끔씩 배송되는 남편의 알리 택배에 뭐가 들어있나 시큰둥 해졌지만 한 때 이것을 도대체 얼마 주고 샀을까 맞춰보는 게 우리 가족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득템 한다. 몇 번 사봐야 사랑스럽다. 알리도 그렇다.



다이어터도 치팅데이가 필요하듯, 가성비주의자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한 옷이든 물건이든, 무형의 무엇으로라도 한번 허기짐을 채우면 만족감이 배로 찾아온다. 나의 아디다스 삼바, 남편의 건담 프라모델, 이적 콘서트 티켓 같은 거 말이다.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들에게 부모의 절약은 때론 궁상맞아 보일 수도,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지. 나도 요아정 노래를 부르는 딸과 마음껏 토핑 추가해서 먹고 싶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성실한 노동의 대가를 알려주고 지혜로운 경제관념을 심어주고 싶어서다. 다행히 요맘때 아이스바와 뭐가 다르냐고 타박하는 중학생오빠가 기꺼이 쿵작을 맞춰준다. 때로는 궁상맞다 싶을지라도 우리는 만족과 소소한 행복을 경험하니까, 온전히 우리 가족의 것이니까 괜찮다.


월 40만 원 학원비 대신 연 3만 원의 강남인강만으로도 성실히 공부할 줄 아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다이소 스티커 하나로도 하루종일 이것저것 꾸미고 놀 줄 아는 감각 넘치는 딸이 사랑스럽다.

장인장모의 생일엔 늘 넉넉히 용돈을 챙겨주는 남편이 고맙다.

그 거봐, 궁상맞지 않다니까.

나 행복해요.


가끔은 가격 텍 보지 않고, 최저가 따지지 않고 자유로이 성큼성큼 쇼핑하는 날이 오긴 할까. 그런 날이 온다면 행복하겠지만 지금의 가심비는 없겠지. 그래도 그 행복을 며칠 만이라도 경험하고픈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노예인가 보다.


사진_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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