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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은채 Mar 01. 2024

출산. 까맣게 잊은 기억 (1)

흔한 듯 흔하지 않은 출산이야기

눈을 떠보니 담당선생님을 포함한 4명의 의사 선생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발이 향한 곳 침대 난간을 붙잡고 있는 신랑과 친정엄마가 보인다. 공포 혼란 슬픔이 가득한 얼굴. 이곳이 어디인지 주위를 둘러보니 수술실은 아니다. 마지막 기억은 자연분만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 급하게 신랑에게 수술동의서를 받았던 기억. 마취전문의를 빨리 대기시키라는 호출전화. 소리 지르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진통을 참다가 어금니가 깨진 기억. 아이가 역아인 데다 저혈압임에도 당시 혈압이 180까지 올라갔기에 수술이 급박한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윤은채 씨 정신이 드세요?"
대답을 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건강히 잘 태어났습니다. 윤은채 씨 정신이 드세요??"

아이가 건강히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고 아까와 같은 광경이었다. 나중에 들은이야기로는 1시간이나 다시 눈을 감고 있었고  긴장감이 맴도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윤은채 씨 엄마와 남편분 알아보실 수 있으세요?"

내가 왜 엄마랑 신랑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당시에는 의문이었다. 당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대답할 힘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조차 없었다. 이번에는 눈을 다시 감지 않고 눈알을 움직였다.
신랑과 엄마 머리 윗부분에 작은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짧은 시곗바늘에 큰 검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어

시간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시 벽지를 보니 시곗바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동그라미가 벽지에도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회복실 벽지가 왜 달마티안무늬 일까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흘러가는듯한 나의 의식과는 다르게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발 대답 좀 해봐. 엄마 알아보겠냐고! 은채야"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엄마를 쳐다보며 '당연하지'라고 대답을 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어]라고 입모양으로 말해주었다.

인간이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힘이 필요한 줄 처음 알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어]라는 한 음절조차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내 입모양을 보고서야 신랑과 엄마는 안도하는 얼굴이었고 의료진들 역시 나를 향해 경직되어 있던 몸이 조금은 뒤로 물러난 것 같았다.
무슨 상황인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10개월간 상상했던 출산직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나 의 상황. 지금껏 TV에서 보았던 산모들은 힘든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아이를 안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간호사선생님들의 축하를 받는 모습이었고 나 역시 그런 나와 아이를 상상했었다.


팔에는 혈관주삿바늘이 꽂혀있고 일반수액이 아닌 빨간 수액이 아닌가. 수혈 중이다.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나?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를 깨운다.

수혈 중인 팩 옆에 수액하나가 추가되었다. 추가된 약 덕분인지, 침대를 비스듬히 세워 배에 힘이 들어가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인지 궁금해 다시 시계를 보니 검은 점의 위치가 바뀌었다.

다시 벽지를 둘러보니 뭔가 이상하다. 눈앞에 모든 사물을 검은 반점이 가리고 있다.


출산 후 첫마디는

"시계도 벽지도 검은 반점이 있어" 신랑이 가까이 와 작은 목소리를 듣고 의사에게 전달했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과다출혈로 인한 일시적인 증상으로 비문증이라고 했다. 수혈을 12팩째 맞고 있는 중이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인실로 예정되어 있던 병실이 아닌 담당의사 선생님과 원장님의 배려라며 나를 VIP실로 이동시켰다.  3개월간 입원해 있던 병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민박집과 호텔의 차이만큼이나 VIP실은 좋았지만 감옥 같은 이병원에서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검은 반점이 사라진 눈으로.


이쯤 되면 죽다가 살아난 상황이란 걸 연신 울고 있는 엄마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손을 잡고 있는 신랑을 보니 알겠는데 아이는 언제 보여주는 것인가. 아이가 보고 싶었다. 어제까지 내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가 너무 궁금했다. 안아보고 싶었다. 나와 함께 10개월을 붙어있던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제왕절개로 아이는 무탈하게 태어났지만 이후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흘러도 내가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랑이 무슨 상황인지 알려줘야 하지 않냐며 소리쳤고 엄마는 실신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심전도 검사를 해야 한다며 누워있던 수술침대를 그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침대에서 떨어질지 모르기에 묶어둔 팔과 다리. 출혈이 심했던 탓에 입술까지 하얗고 핏기가 없어 꼭 시체 같았다는 신랑의 말. 신랑과 엄마에게는 무척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리라.




임신 7개월 차에 나는 너무 건강했고 아이 또한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에 출근하는 신랑을 위해 매일 5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서 쥐어주고 현관 앞에서 신랑을 배웅하고는 작은 신혼집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어지르는 사람도 없는 집을 청소하고 뱃속 아이를 위한 식단으로 혼자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며 여유로운 임산부의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날은 침대와 매트리스가 배송되어 온날이다. 침대위치를 아직 정하지 못한 상황이라 저녁에 신랑과 상의 후 배치하기로 했기에 배송기사님께  안방이 아닌 현관 앞까지만 놓아주시길 부탁드렸다. 소파에 앉아 침대와 매트리스를 보는데 눈에 거슬렸다. 신랑이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자리를 잡은 침대를 짠 하며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순산을 위해서는 많이 걷고 많이 움직여야 한다며 임산부라고 몸을 사리지 않았기에 매트리스를 옮기는일 역시 충분히 할 수 있다 생각했다. 허리를 숙여 매트리스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엉덩이와 허리 아랫배에 힘이 꽤 많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예상보다 무거운 매트리스에 당황했지만 이대로 내려놓으면 엄청난 소리에 이웃집에 민폐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천천히 바닥에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 무거운 매트리스를 천천히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데 허벅지 안쪽 피부가 간질간질 거린다.

원피스를 들어 올려 보니 가랑이 사이에서 빨간 점액이 천천히 타고 내려온다.


그날부터 3개월간의 장기입원이 시작되었다. 임신 28주 자궁 경부길이가 3cm까지 짧아져 화장실을 갈 때도 정수기물을 마시러 갈 때도 휠체어를 이용해야 했다. 장기입원이 예상되어 6인실로 입원했다. 3개월간 신랑은 배웅해 주는 이도 없이 도시락도 없이 새벽 5시에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저녁식사 끼니를 포장해 내가 저녁 먹는 시간에 함께 저녁을 먹고 말동무를 하다가 10시에 다시 집으로 갔다. 매일 반복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매일 헤어질 때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조심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뱃속아이에게도 신랑에게도 미안함뿐이었다. 매일 밤 조용한 병실에 누워 신혼집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9년째 5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못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잠이라도 많이 자둘 걸...
당시에는 하루종일 24시간을 병실에 누워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는 것 뿐었다.
책임감으로 다가오기 보다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컸고 출산 전부터 쓸데없는 병원비 지출 역시 속상했다.

그런 심경으로 맞이한 출산일이었다. 그렇게 몸무게는 25kg나 늘어있었고 임신성당뇨까지 진단받았다.

이제 더 이상 아이도 나도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 것이다.



희찬이가 태어난 시간은 오후 8시 20분. 내가 깨어난 시간은 그다음 날 오전 6시였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 시간이 오전 7시였던 것이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와 신랑이 얼마나 애를 태웠을지를 생각하면 죄를 지은 기분이다. 얼마 전 아주버님을 뵈었을 때 그날 신랑의 심정을 전해 들었다. 무뚝뚝하고 감정표현에 서툰 신랑입에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그날 처음으로 들었다고 하셨다. 그날 신랑은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렵다며 아주버님께 상황을 전했다고 하니 다시 생각해도 가슴 한편이 애리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뻔한 배우자라는 것이 신랑에게는 큰 의미로 남아 있는듯하다. 아이하나는 외로워서 안 되겠다던 이가 절대로 둘째를 낳지 않겠다고 바뀌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임신과 출산의 기억을 신랑은 인생에서 가장 지하로 내려갔다 온 시간이라고 빨리 잊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게 끝일줄 알았다. 출산하기 전 3개월을 마음고생시키고 출산마저 쉽지 않게 했으니 이걸로 마지막 일 줄 알았다.

(다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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