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Feb 15. 2024

나만 편하려고 둘째를 안 낳는 게 아닙니다.

소중하니까 안 낳는 거예요

“엄마, 나 동생 낳아줘.” 

“사랑아, 생명은 책임질 수 있을 때, 낳는 거야.”

올해 아홉 살이 된 딸아이와 3년째 진행 중인 실랑이다. 

결혼하면 성별 상관없이 무조건 아이 두 명은 낳을 줄 알았다. 딸아이 이름도 태어날 둘째 아이 이름을 고려해서 지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양가 부모님의 경제적·양육적 도움 없이 결혼과 육아를 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아이를 가장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고, 가장 늦게 데리러 가는 맞벌이 부모였지만 늘 생활이 빠듯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늘 아이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고, 둘째를 낳는다는 것은 대책 없는 부모의 욕심일 뿐임을 알았다. 그렇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둘째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너 편하려고 둘째 안 낳는 거 아냐? 애 하나 키우는 게 뭐가 힘들다고!”

“사랑이 키우는 건 안 힘든데, 어머니 아들 키우는 게 힘들어요!”

다소 폭력적인 시어머니의 말에, 참을성 없는 며느리는 가장 아끼는 아들을 소환하는 과감한 말로 받아쳤고, 영문 모르는 신랑만 애먼 돌을 맞았다. 둘째를 낳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게 이기적이라는 부당한 딱지를 붙인 것이 억울했다.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고, 시어머니가 자녀 낳기를 주저하는 오늘날의 낯선 변화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자녀를 키우는 기쁨은 세대 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소중한 기쁨을 선택할 수 없는 삶에 함께 아파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여러 학원을 오가며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딸아이를 보면 죄책감에 짓눌린다. 조만간 딸아이가 ‘과열된 경쟁’에 내몰려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면, 부모의 기쁨을 위해 아이가 희생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스럽다. 아이들은 당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부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미래를 상상하기는커녕 현재를 즐길 수도 없다. 자녀 낳기를 주저하는 것은, 이 냉엄한 현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양심적인 배려이자 지극히 합리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먹을 것이 없고 지켜낼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아무 대책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동생을 가질 가능성이 점점 불확실해지자, 딸아이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어떤 설득에도 그 간절함은 꺾이지 않았다.

“그럼, 일단 개와 고양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알아보는 게 어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와 ‘동물농장’이라는 TV프로그램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다니 딸아이는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이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엄마, 지금은 안될 것 같은데, 어른이 되면 꼭 고양이를 키울 거야.”

내 전략은 완벽히 적중했다. 그녀는 학대받고 버려진 동물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생명을 돌보는데 수반되는 깊은 ‘책임감’을 배웠다. 동물의 습성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명을 대할 때는 ‘준비와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 다른 존재를 품는다는 것은 단순한 애정과 욕망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아이를 보살피는 일이든,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돌보는 일이든, 한 생명을 마주한다는 것에는 무거운 책임감과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손가락을 감싸는 아이의 작은 손의 온기와 반려동물을 껴안고 심장 박동을 느끼는 순간, 보살핌 아래 꽃을 피운 식물의 경이로움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생명을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서 ‘존엄성이라는 생명’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존엄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 딸아이가 애지중지 돌보는 고양이와 토끼 >


내가 어릴 적, 동물을 기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던 아버지는 현재 고양이 ‘순이’와 한 침대를 쓰신다. 때때로 드리는 용돈은 극구 사양하시면서, 고양이 장난감과 다이어트 간식, 영양제 선물은 거절하는 법이 없다. 아버지도 동물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좋아해서 키우지 않았던 것’이고 ‘소중하니까 참았던 것’이었다. 

“아빠, 돼랑이(돼지+호랑이+고양이)한테 츄르(순이 최애 간식) 너무 많이 주지마세요. 고도 비만이예요.”

“순이가 어디 살이 쪘다고 자꾸 돼랑이라고 그래! 털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거야.”

순이는 현재 배가 바닥에 끌릴 지경이다. 사랑에 눈먼 자는 객관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는 법이다. 




사랑이가 독립한 후, 내게도 사랑스러운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떤 동물이 될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않았지만, 이름은 이미 정했다.      


태어나지 못한 둘째의 이름 ‘라온’     



<사진 출처 : pixab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