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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Feb 14. 2024

‘가족’ 편안함과 불편함의 그 어디즈음

남편 없는 설 연휴

음력 1월 1일 어김없이 ‘설날’이 다가왔다. 어릴 적 즐거운 만남을 기대하며 분주히 준비했던 추억은 복잡한 관계망으로 인한 불편함과 피곤함으로 바뀐지 오래다. 운 좋은 남편은 1주일간의 가족 여행 직후인 설 연휴 하루 전날, 카타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덕분에 나는 퇴근 후, 딸아이 손을 잡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부모님께 드릴 용돈과 조카 선물, 과일 선물 세트를 준비해야 했다. 차 트렁크는 가득 찼지만, 통장 잔고와 내 체력은 바닥이다.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지고 거실 바닥에 大 자로 몸을 던진다. 씻을 힘은 물론이고 안방까지 갈 힘도 없다. 짐은 내일 새벽에 싸야겠다.      


오전 9시. 재차 눈을 깜박이고 확인해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정오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지만 당장 출발해도 제시간에 맞춰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순간 여행 후 미처 풀지 못한 채 방구석에 방치해 둔 캐리어가 나의 선견지명이 되었다. 여행 가방을 그대로 재탕하는 기지에도 불구하고, 차들로 빽빽한 혼잡한 도로 위에서 발이 묶이고야 말았다.

“점심은 우리끼리 먼저 먹을 테니까, OO 키즈카페로 와.”

도로 위의 지루함을 덜어주면 좋으련만, 무뚝뚝한 남동생과의 대화는 10초를 넘기기 힘들다.



“형님, 혼자 준비하고 오느라 힘드셨죠? OO 씨한테 사랑이 맡기고 우리끼리 마사지 받으러 가요.”

공감 능력 제로에 완벽한 계획 추구형인 피곤한 남동생과 같이 사는 올케는 역시 마음 씀씀이도 다르다. 대형 키즈카페의 화려함에 매료된 딸아이는 잡고 있던 손을 미련없 뿌리치고 달려갔다. 숙련된 부드러운 손길이 지날 때마다 온몸을 움켜쥐고 있던 피로의 매듭이 풀렸고, 눈꺼풀도 함께 스르르 닫혔다. 깨고 싶지 않은 단잠을 갓 내린 커피 향기로 애써 깨운 뒤,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마사지와 강력한 카페인으로 충천했으니, 엄마 차례상 준비는 이미 다 한 것과 마찬가지다.      


연료 탱크에 체력을 가득 채웠다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딱 차례상을 차릴 만큼만 채웠으니, 차례를 지냄과 동시에 체력 게이지는 다시 레드존으로 떨어졌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차례상을 정리하고 큰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까지 드리니, 귀에선 경고 메시지(이명)까지 울린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손녀를 품에 안을 생각에, 핸드폰을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놨다 했을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잠시 엉덩이를 붙일 시간도 없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이명 소리는 더 커졌고 찬양으로 예민해진 마음을 달래가며 겨우 시댁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리 사랑이 왔네! 이음아, 불 넣어 놨다. 얼른 가서 한숨 자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손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주차장에서 쌀쌀한 날씨를 견디고 있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좀 더 쉬다 출발할걸’ 했던 잠깐의 마음에도 죄책감이 든다. 친정 엄마 차례 준비로 피곤했을 며느리를 위해 온기 가득한 안방에 포근한 새 이불과 베개를 준비해 놓는 시어머니는 흔치 않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잠을 청하는 며느리도 드물다.




시어머니와 이런 돈독한 관계를 만들기까지 감정의 교차로를 수도 없이 지났다. 세상에서 자기 아들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와 그저 남의 집 딸일 뿐인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외줄 타기 같은 갈등 속에서 우리는 1,000시간이 넘는 대화로 오해를 풀어내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이음이 너한테만 이런 이야기한다. 아버님한테도 너네 신랑한테도 한 번도 꺼낸 적 없다. 세상에서 나만큼 많이 운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이미 열 번도 더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머니는 늘 처음 이야기하듯, 어릴 적 힘들게 자라온 이야기를 꺼내신다. ‘자신이 태어난 날 엄마를 잃은 아기, 원망할 이가 없어 자신을 원망했던 아이, 계모에게 학대당했던 아이, 오빠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남의 집에서 홀로 눈물을 삼키며 일해야 했던 소녀, 견디기 힘든 노동에 친정으로 도망쳤지만 강제로 다시 지옥 같은 일터로 내몰렸던 소녀.’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듯 따갑다. 그토록 외롭고 서러운 고통의 세월을 남편과 두 아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에 묻고 살아왔으니, 앞으로 수십 번 더 듣더라도 기꺼이 함께 울 것이다.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 찬 일상이 고단하기에, 휴일 동안에는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임과 동시에 감내해야 하는 피로감을 떠안고 싶지 않았고,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로 인한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를 피하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들킨 것일까, 올케와 시어머니는 일상에 스며드는 따뜻한 배려로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부모님의 격려와 남매간의 의리, 며느리로서의 동지애 등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들은 단순히 생물학적 연결이나 소속감으로 묶인 사이가 아닌, 흔들리지 않는 지지의 요새이자 변함없이 나를 받아주는 항구이다.


오해와 갈등으로 불편하고 피곤했던 시간이 분명 있었고,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과정이 늘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이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사이,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더라도 숨길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웃음 포인트에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신경 쓰지 않아도 몸에 밴 배려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여전히 함께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생겼고, 서로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또다시 부딪히고 서로 상처를 줄 수도 있겠지만,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람들 또한 그들이 될 것이다.      




“이음아, 나보고 너네 신랑이 너한테 전화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떠나기 전 남편은 내게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었다. 덕분에 어머니의 신세 한탄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 사진 출처 :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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