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철학적 사고의 가뭄 속에 살고 있다.
“너는 무슨 가치를 위해 살아?”, “너는 왜 열심히 해?”, “너는 왜 살아?”
모두 우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춘 질문들이다. 친구들을 만나도 이런 질문들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거나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철학적 고민으로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들을 하기 싫어하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철학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고민들을 담은 철학책을 읽는다고 얘기하니 “그런 쓸데없는 책은 왜 읽는 거냐?”라는 질문을 들은 적도 있다. 절대 철학책을 읽고, 철학 지식을 늘려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책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철학적 사고방식을 하는 능력을 기를 수는 있으나, 철학지식을 많은 것이 곧바로 철학적 고민들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단순 철학지식이 아니라, 철학적 고민과 사고방식인 것이다.
“당신은 무슨 가치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그냥 사는 거지 뭐”, “그런 거 생각하고 살 시간이 없어”라는 답변들을 많이 듣곤 한다. 죽음 이후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신의 삶의 실존을 고민하는 것이 드문 사회다. 철학적 지식이 부재하다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고민을 할 근력 자체가 약해져 그런 고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회현상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공부하다 “선생님, 공부는 왜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꼭 공부 안 하는 애들이 그런 말 하더라”라는 훈계와 “그런 생각할 시간에 공부나 해라”라는 답변을 듣지 않는가.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이러한 고민들을 하지 말 것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들을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해주는 대로 사는 삶’
철학적 고민이 부재한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주는 대로만 살게 된다. “왜 공부를 열심히 해?“라는 질문에 ”엄마가 시켜서요.“라고 말하는 학생처럼, ‘공부’는 ‘일’로 ‘엄마’는 ‘회사’로 바뀐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왜’라는 질문을 갖지 않고 사니 사회 속에서 그냥 일하는 기계와 다를바 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일을 하는 것도 오직 먹고 살기만을 위하는 것이니 어떠한 직업윤리와 사명감 없이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는 자신 또한 직업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으니 어떠한 성취감과 보람 없이 일해서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우리나라는 시대적으로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그 안에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다. 일례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너나 할 것이 들뜨고, 모든 식당과 카페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인테리어 소품들로 장식한다. 서울 명동에서는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 간의 크리스마스 경쟁이 펼쳐지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러 온 커플들로 명동이 가득찬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기독교인구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크리스마스를 굉장히 중요한 기념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화려함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반추하는 사람이 드문 현실이다.
우리 시대의 사랑을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이 떠오른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느때보다도 성적으로 개방되고, 성적으로 자유로워졌다. 남녀가 함께 나오는 연애 프로그램도 많고, 연애를 많이하는 사람은 1년에 몇번씩도 이성과 썸을 타고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은 드물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책임감과 사랑을 주는 기쁨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드물고, 때로는 육체적 이끌림에 뜨겁게 만났다가 또 다른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책임 없이 떠나는 사람도 많다. 아니 어쩌면 원나윗이나 fwb와 같은 관계는 서로 책임을 지지 말자는 합의 하에 즐기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이런 관계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사랑의 특정 정의를 내리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 고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윤리'의 결여
윤리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규범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도덕의 본질ㆍ기원ㆍ발달, 선악의 기준 및 인간 생활과의 관계 따위'이다.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 사회에 절대적 윤리적 기준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앞으로의 글에서도 절대적 정답으로서 윤리를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특정 윤리적 기준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자 삶의 기준이 되는 '윤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답은 없을 수 있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기준과 각자의 삶에서의 정답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죽음에 대한 고민, 삶의 이유에 대한 고민, 내 삶에서 중요시 여기는 가치에 관한 고민, 내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윤리의식, 사랑에 대한 정의와 고민과 같은 각자의 '윤리'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왜 이러한 철학적 고민이 필요한지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