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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 Dec 06. 2023

나오면 무언가가 벌어진다

적으면 뭐라도 써지듯이


여긴 완전 동네다. 소도시에 있는 한적한 동네를 걷는 기분이다. 옛날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시장초입과 낮고 클래식한 디자인의 저층 건물들 그리고 특유의 분위기가 풍긴다. 냄새도 한몫한다. 이곳을 더 느끼기 위해 에어팟을 빼고 천천히 걷는다. 야채가게, 해산물 가게, 꽈배기, 한약방, 그 사이에 껴있는 붕어빵 파는 할머니, 떡방앗간 등등 시장의 필수요소를 다 품고 있는 완벽한 골목이다.


집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읽다 몇 장 남지 않아서 찜해놨던 카페로 향했다. 읽으면서 애착이 많이 갔던 책은 무언가의 의식처럼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 진다. 가본 적 없는 동네의 어느 고요한 카페에 도달했다. 문을 열자 커튼 뒤로 감추어놓았던 공간으로 인해 동네 분위기와는 또 다른 이곳만의 분위기, 디저트, 그리고 커피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곳을 온전히 즐기자는 자세로 들고 온 책을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해 지는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다. 요즘 석양을 마주하기 힘드니까. 5시만 되어도 태양이 건물들 사이로 쏙 빠져버린다. 그러고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바통 터치하듯 가로등이 팟- 하고 켜지는 걸 목격할 수 있다. 겨울은 겨울인가 보다. 때마침 하루가 짧은 것 같다고 카페 사장님도 한 말씀하신다. 소중한 겨울 빛을 더 탐하기 위해 핸드폰을 내려둔 채 창밖을 응시한다. 어차피 내 눈에 보이는 건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기 어렵다. 그러다 옆 사람의 작업물을 곁눈질로 쳐다본다. 80%의 확률로 작가님인 것이 틀림없는 게 노트에 목차가 일목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감을 앞둔 사람처럼 살짝 지저분한 자리. 진행이 더딘지 잔뜩 인상을 쓰더니 이윽고 술도 주문하신다. 뭔가 어른스러웠다. 왜냐면 난 아직 카페에서 술도 주문하지 못하는 애송이이기 때문이다. (24년 버킷으로 카페에서 알코올 주문하기를 추가해도 좋다는 생각이 방금 떠올랐다)


애송이인 나는 드립커피와 바나나브륄레를 주문했다


바빴던 11월이 끝나고 다시 한적했던 10월로 돌아간 기분이다. 또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까 지금의 여유를 즐겨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초조해지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종일 집에만 있으면 잡생각이 들기 십상이라 하루에 한 번씩 외출을 꼭 감행한다. 멀든 가깝든 간에 (살짝 과할 정도로)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나를 사회적 지위에 맞게 꾸며 나오면 기분이 왠지 들뜬다. 나 자신을 아껴주는 기분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랄까.


어제도 카페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데 때마침 퇴근시간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계단을 올라오는데 나만 반대로 내려갔다. 마치 스무 살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술 마시고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나 홀로 집으로 돌아갈 때, 일찍이 출근하는 사람들을 역방향으로 지나치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살짝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라는 걸 살갗에 닿았다. 물론 나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또 각자만의 바운더리에 있을 테니 그렇게 유별난 건 아닐 테다. 그냥 단순히 기분이 묘했다고. 그뿐이다.


옆 사람도 글을 쓰고, 나도 글을 쓰고, 여기 카페 사장님도 글을 쓰는 것 같다. 카페 한 켠에는 큐레이션 된 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나도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작가님처럼 쓰고 싶다.. 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주제를 정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작가란 여러 물 웅덩이를 연결시키고자 길을 잘 들여서 파고 삽질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잘 터주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다. 누군가의 일기는 한두 번 보면 재밌겠지만 계속 보면 질리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문득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왔던 시장 길을 되돌아갔다. 이 세계로 올 땐 해가 뜬 낮이었는데 지금은 푸른빛의 밤이 되었다. 실제로는 한 시간 남짓밖에 흐르지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보았다. 하루는 길고, 일 년은 짧다고. 겨울엔 해가 더 짧아지니까 연말이 되면 벌써 1년이 지났다고 느끼는 거다. 실제로 해의 시작인 1월도 겨울이고 12월도 겨울이니까. 이러나저러나 1년은 찰나이고 시간이 빠르다고 느껴진다면 이렇게 별 볼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하루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 마음으로 소화시켜 손끝으로 표현해 내는 이 글쓰기의 과정을 더더욱 좇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무언가의 발견을 머리카락 휘날리며 밖으로 나온다. 나오면 어떤 일은 벌어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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