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노후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생각은 있어?”
몇 해전부터 남편은 계속 술만 마시면 ‘노후’ 이야기다. 아직 43살인 우리는 동갑 부부이다.
나: “아직 멀었는데 뭘 벌써 노후 이야기야.”
남편: “멀긴 뭐가 멀었어. 이제 곧 50이고 60 된다. 너는 어떻게 살 건데?”
나: “몰라.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애들 자기 거 좀 챙기고 하면 나도 일해야지.”
남편: “10년 쉬었는데 다시 일할 수 있겠어? 너무 쉽게 생각한다. 남들은 연금 들고 노후 준비 자금 만들 때 너는 일하러 다닐래?”
나: “일 할 수 있으면 감사하지."
남편:“너는 몇 살까지 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도 직장 다니면서 언제 짤릴 지 몰라.”
나: “글쎄. 우리 선배 중에는 아직 현직에 근무하시는 분들도 많으시고 50살에 시작하시는 분도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10년 이상은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막연한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는 나와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라는 남편의 압력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긴 했다. 그렇지만 술 먹으면 하는 ‘노후 타령’ 레퍼토리의 압력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타지에서 혼자 아들 둘을 키우며 살림하는 것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바쁜데 심심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책육아를 한답시고 도서관을 다니고 눈만 뜨면 책을 읽히고 거실, 화장실, 부엌 어디나 책이 발에 치이도록 던져 놓고 책을 읽어주고 또 읽었다. 매번 아름다울 순 없었다. 총알이 날아오잖아, 날아오는데 내가 어쩌겠니 엎드려야지. 바짝 엎드린 채 10년을 포복하며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아이들을 낳기 전 내 직업은 ‘언어치료사’였다. 12년을 근무하고 은우(큰 아들)가 3살이 되던 무렵에 주말 부부를 하던 우리는 살림을 합치고 남편이 근무하던 경주로 이사 오게 되었다.
홀홀단신 애 맡길 데 없는 동네에서 내 애를 키우려니 일을 시작하는 건 택도 없는 일이었다. 시도해보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두꺼웠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남편과의 갈등이었다. 남편은 아이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반가이 맞아주고 챙겨주는 엄마의 역할을 요구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남편의 아내는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언어치료사는 하교시간부터 맹렬하게 일해야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 것이다.
남편은 퇴근을 하면 저녁을 먹고 수영장에 가고, 2시간 뒤에 특유의 남자 스킨향을 풍기며 들어와서 밤참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즐기며 여유롭게 혼자 자유를 만끽하다 잠이 든다. 겉모습은 세련되고 적당히 큰 키에 호감형이나(얼굴 보고 결혼한 거 같다) 속은 70대인 시아버지만큼이나 깐깐하고 보수적인 경상도 삼대독자다. 남편은 힘들게 일해서 우리 가족이 사는 만큼 대접받기를 원했고 전업주부인 내가 집안일을 전적으로 하니 집안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야말로 패기의 남자이다. 연애 때는 제사 음식을 같이 만드는 가정적인 남자인 줄 알았으나 모두 뻔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만약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가정과 아이, 일 이 세 가지가 모두 균형 있게 돌아가려면 남편의 협조는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평소에도 슈퍼 우먼으로의 삶은 그다지 동경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버거웠기 때문에 어쩌면 스스로 더더욱 경력 단절의 시간이 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몸은 편했고 그래서 더 조금만, 조금만 일 안 하고 자유 부인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고향인 대구로 이사를 오면서 한가롭고 여유롭던 경주의 생활과는 달리 도시의 답답함과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와 친구들에게 적응하느라 시간을 보내는데 여름에서 겨울의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이들이 안정을 찾게 되니 조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고 그제야 봄의 파릇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고향에 돌아옴을 알리고 안부를 묻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제공하겠으니 일을 다시 시작해 보자는 동료 선생님의 이야기가 오갔고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인 오전을 이용하여 근무를 해 보기로 하였다. 아이들에게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해서 결정한 시간이었다.
처음에 남편에게 일을 시작하겠다고 말을 꺼냈을 때는 반대하지 않고 10년의 기간 동안 일을 못한 상태이니 1시간~2시간이라도 가서 치료실의 변화를 알고 적응하면서 치료감각을 익히라고 하였다. 그러나 막상 1시간을 하러 가게 되었을 때가 되자 말이 바뀌었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뭣하러 가나? 차비도 들고, 나가게 되면 식사도 하게 되면 더 손해라는 것이다(estj다운 합리적 발상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나는 어떻게든 나가기 위해 3시간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무조건 나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원씽’을 읽고 있었는데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행복에 다섯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긍정적 감정과 기쁨, 성취, 인간관계, 참여, 그리고 의미이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 느낌표의 깨달음이 번쩍 떠오르며 10년의 시간 동안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결핍되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참여와 의미’의 문장에서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것 같은 속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집밥을 해 먹이고 사교육 없이 엄마표 한글, 엄마표 책 읽기, 엄마표 영어를 하는 것으로 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성에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로서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의 유효기간이 있지만 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무언가는 내 젊음이 시들지 않을 때까지라는 한시적 유효기간이 있다. 더 늦기 전에 “10년을 온전히 아이들을 키웠으니 나도 이제 좀 커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아니면 또 집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안에서 봉인되어 있던 열정이 해제되고 다시 꿈을 꿔보려고 한다. 100세 시대에 43살에 꿈꾸는 거 불법도 아닌데 까짓것 한 번 해보자! 그래! 나 욕망 있는 여자네. 다시 시작한다 지금부터!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