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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님호 Apr 01. 2024

수십 겹의 기억과 당신의 기억

<원더풀 라이프> (1998)

 


불온한 현재를 살아가면서 그 지난함을 견뎌내게 하는 어떤 기억들이 있다. 연속적인 과거의 시간을 쪼개내어 하나의 불연속적인 마디로 남아 있는 것이 곧 기억이다. 인간 내부에 기억 도서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가 경험한 인상적인 순간들은 한 권의 책이 되어 완성된 단편으로 남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필요할 때 그것들을 꺼내 볼 수도 있을 테다. <원더풀 라이프>는 당신에게 죽음의 순간에서 어떤 기억을 담은 책 한 권을 갖고 갈 것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영화는 죽음 이후 사후세계로 가기 전 거쳐야 할 중간단계를 상정한다. 그곳에서 망인들에게는 영원의 시공간에서 안고 살아 갈 단 하나의 소중한 기억을 선택할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는 선택한 기억 외의 모든 기억은 전부 지워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들에게 과거는 한 순간도 복기하고 싶지 않은 불행의 연속이고, 그다지 특별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대체로 고만고만했던 삶의 과업들의 충실한 실천이자, 어린 날의 풋풋한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노스탤지어다. 망인들은 자신의 생애를 통째로 복기하면서 어떤 기억을 끝끝내 복원할지 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영화는 청소년부터 치매 걸린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생전에 겪은 에피소드를 인터뷰어의 시점으로 차곡차곡 이어 붙인다. 그러나 그 기억이 각각 가지고 있는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기 보다는 인물들이 기억을 추적해나가는 과정, 그 속에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것에 더 포커스를 둔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서 배경음악도 없이 이루어지는 이 작업은 영화의 속도를 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집요하게 이어진다. 기억을 선택하고 마침내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끝내 선택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를 비추며 어김없이 다음 사람을 맞이한다. 이것은 이 영화가 계속 견지하고 있는 삶 자체를 바라보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떠나갈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편견없이 개인을 마주하고, 안온한 시선으로 고요히 응시하면서 축복을 빌어주는 다정한 삶의 태도. 


 소중한 것들이 생긴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잃을 것 또한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삶은 종종 두렵다. 어쩌면 그것들을 잃을까봐 불안해하는 대신 소중한 것들을 포함한 모든 기억을 모두 잃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더풀 라이프>에서 고유한 ‘나’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망각하기, 라는 선택지는 없다. 누구든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해야 하고, 그 결정은 생의 모든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 행복 또는 고통을 동반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지속되는 질문과 여운을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그 목적을 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더풀 라이프>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 왔다. 칠레의 역사적 상흔을 겪어 낸 사람들의 기억을 조망하는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나, 안드로이드의 기억 저장 장치에 기록된 장면들을 추적하는 <애프터 양>, 세상을 떠난 아빠와 함께 여행했던 유년의 기억을 성인이 되어 아프게 회상하는 <애프터썬>과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중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내레이션으로 나왔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이 구절이 <원더풀 라이프>의 메시지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믿으며.


 “기억에는 중력이 작용한다. 끊임없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허약한 현재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발붙일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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