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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30. 2023

'플란다스의 개' 아찔했던 그 순간

읽는 중학생을 만들어 준 우리 집 독서의 터닝포인트!



이 이야기는 우리 집 독서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순간이며, 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순간 중에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플란다스의 개’를 읽고 책을 덮던 순간 아이의 표정과 말투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일은 내가 아이의 눈빛에 집착하게 만든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다. 



출처 : Pixabay

큰 아이의 독서는 매 순간 나에게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유난히도 좋아했고, 또래에 비해 압도적인 분량을 읽어내는 아이였다. 물론 나는 아이가 원할 때 언제든 내 목이 터져라 책을 읽어주는 열정 넘치는 엄마였다. 영유아를 키우는 모든 엄마들이 한 번씩은 겪는 ‘내 아이 천재설’이 나에게는 단순 천재설이 아니라 정말 특별한 아이로 다가왔던 시절이었다.


초2겨울에 해리포터 전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어낼 만큼 아이의 독서력은 높았고, 나는 그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부끄럽게도 그 당시 나는 정말 내 아이가 성인 수준의 책까지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겨우 초2짜리가 얼마나 심오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그런 망상을 했는지 헛웃음이 난다.


학교 도서관에서 800 페이지가 넘는 쥘베른의 ‘해저 2만 리’를 빌려왔을 때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걸 읽겠다고? 금방 포기할 것 같았던 아이는 그 책을 다 읽고 너무 재미있다며 즐거워했다. 덕분에 엄마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올라갔다. 워낙에 해양생물을 좋아했던 아이에게 이 책이 큰 즐거움으로 다가온 것은 당연했다. 굉장히 마이웨이였던 아들은 네모선장이 잠수함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낸 감정이나, 아로낙스 박사 일행의 탈출 따위에 관심이 있었던 아이가 아니었다. 다양한 생물의 등장에 그저 내셔널지오그래픽 영상을 감상하는 것처럼 직관적으로 봤으리라 예상한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독서를 이어가던 중에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있다.


‘플란다스의 개’를 펼친 아이가 정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초집중을 해서 한 권을 끝낸 뒤 세상 해맑고 환한 표정으로 ‘정말 재미있다’라는 말을 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아이의 표정과 눈빛에는 넬로나 파트라슈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이 없었다. 아이는 긴 호흡의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스토리를 영화처럼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에 공감이 부족한 상태로 글자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2학년 아이에게 난 얼마나 대단한 공감을 기대하고 얼마나 대단한 독서 선행을 기대한 것인가. 연령에 맞는 책이 출간되는 것은 다 그에 맞는 이유가 있는 것인데. 아이의 독서가 자랑스러웠던 엄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이에게 그림책과 저학년 문고를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제공해 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림책을 같이 읽으며 아이와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 순간에도 아이는 꾸준히 고전이나 긴 호흡의 책들을 즐겼지만 그걸 막지는 않았다. 다만 엄마와는 그림책을 최대한 즐겁게 소통하며 읽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했다. 다행히 아이는 중학생이 된 지금도 책을 즐기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순간을 놓치고 아이에게 더 높은 수준의 책을 줬다면 아마도 어느 순간 아이는 책에 공감하지 못하고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Pixabay

앞부분에 언급했던 ‘해저 2만 리’를 초2에 처음 읽은 후 아이는 매년 반복해서 읽고 있다. 궁금한 마음에 그 책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매년 읽을 만큼 좋은지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다시 한번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비록 중등이 되어 말문을 닫은 아이라 몇 글자 없는 대답이었으나 그 몇 마디 대답조차도 듣기 힘든 게 중등 아들엄마여서인지, 아니면 아이의 대답이 나에게 정답을 준 것 같아서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대답은 다시 한번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엄마, 다 달라. 매년 읽을 때마다 달라. 이 작가는 정말 천재인 것 같아’라고 대답을 하는 아이의 표정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중등 아들이 집에서 보여주는 표정은 화난 무표정과 귀찮음의 무표정과 약간 입꼬리가 올라간 무표정이다. 그 속에서도 기분 좋음을 찾아내는 건 사춘기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대답을 듣고 아이에게 쥘베른 작가의 책을 시리즈로 모두 사주었다. 책을 마음껏 사주는 엄마는 아니다. 이 선물은 사춘기 아이에게 천재 소리를 듣는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었고, 말문을 닫았으나 책 속에서 마음껏 헤엄치기를 바랐던 엄마의 마음이었고, 엄마를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만들어 준 아이의 대답에 대한 보답이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아이는 그 책을 매년 새롭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저학년 엄마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이의 대답 속에 있었다. 좋은 상을 받은 수상작도, 유명한 누군가의 추천책도, 오래도록 사랑받은 고전도 결국에는 내 아이가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 읽어야 더욱 좋은 책인 것이다. 아이에게 책으로 무리한 선행을 요구하지 말고 그 나이에 맞는 책으로 충분히 책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말문을 닫은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정성 있는 조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춘기 아이가 책을 읽게 하려면 그 이전에 책의 즐거움에 푹 빠져본 경험이 꼭 필요할 테니 말이다. 





오늘도 공부는 안 하고 신나게 게임하고 잠들기 직전 뒹굴며 책을 읽고 있는 나의 사랑스러운 중학생 아들을 바라보며 속이 텅 빈 웃음을 지어본다. 그래도 책은 꾸준히 읽고 있으니 괜찮다. 매 순간 나를 칭찬하고 또 칭찬한다. 다른 아이보다 높은 수준의 책을 읽는 것에 자만하는 엄마가 아니라 책을 즐겁게 읽고 있는 모습에 자만하는 엄마로 살아온 것은 내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자만이었다. 


말문을 닫음으로 답답해진 엄마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나의 아이에게 감사하며 아이와의 시간을 꾸준히 기록해보려한다. 누군가는 이것을 읽고 나와 같은 아찔한 순간을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너는 읽어라, 엄마는 글을 쓸 테니!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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