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Oct 20. 2023

중고 백수, 첫 직장의 가로수 길을 거닐다. -상-

첫 번째 나무: 신규 간호사.

 매일 우는 신규 간호사에게도 행복은 찾아오는가.


 9년이 훌쩍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24살 신규 간호사였고,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 한 복판에 서있는 최전방의 전사였다. 최전방 전쟁터에 떨어진 신병은 매일 눈물을 흘려야 했다. 스스로의 무능에, 후려치는 나쁜 말들에, 내가 맡은 환자들의 죽음에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퇴근길엔 늘 우울감에 젖은 채, 스스로 이 불행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온몸이 똥으로 뒤덮인 의식 없는 환자가 119 스트레처카에 실린 채 내원했다. 뇌졸중이 예상되니 빨리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저 똥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엄습했다. 내원과 동시에 바이탈을 확인해야 했으므로 똥에 절은 옷을 잘라 버리고, 팔에 붕대를 얇게 감고 혈압 측정을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 나에게 배정된 환자였으므로 오더에 따른 검사를 진행해야 했는데 이 상태로는 검사 진행 불가. 나를 도와줄 선임도, 환자의 보호자도 없이 막막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수산물 시장에서나 볼법한 앞치마를 두르고, 페이스 쉴드, 라텍스 글러브로 중무장한 후 환자 몸을 닦기 시작했다. 이걸 빨리 끝내야 혈액검사, CT, MRI를 진행할 수 있다. 이 생각 하나로 몸을 바삐 움직였다.


 그때였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듯 서브차지를 맡으신 선배 간호사가 다가왔다. 도저히 혼자 할 수 없을 거 같다며, 라텍스 글러브만 겨우 끼시고 나와 함께 환자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훗날 본인이 맡으신 일은 어떻게 정리하고 오신 건지 물어보니, 책임간호사 선생님께 혼날 각오로 부탁드렸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지 물으시곤, 묵묵히 내 지시(?)에 맞춰 몸을 움직여 주셨다. 검사와 각종 처치 후, 다행히 환자분은 의식을 찾으시고 가족분도 오셔서 입원실로 이동하실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나를 도와주신 선배 간호사를 향해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싱긋 웃으시며 한 마디 대답을 남기셨다.


이 다음에 너도, 너처럼 힘들어 하는 후배를 도와주면 돼.


 그날 퇴근길은 울지 않았다. 환자의 의식 회복도 기뻤지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함께 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후로도 해당 선배 간호사분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고, 힘든 업무를 함께해 주시고, 늘 응원해 주셨다. 비로소 나는 행복한 신규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신규 간호사가 언제나 행복할 순 없었지만. 하하하.-


내가 간호사로 꽤 오랜 기간 근무 할 수 있었던 힘은 이 분으로부터 나왔다고 확신한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셋, 중고 백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