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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봄 Oct 18. 2023

평생의 롤러코스터 : 조울증

나의 폐쇄 병동 입원기 - 1

23.10.5 목요일


마침내 입원 권유를 받았다. 회사 카운셀러와의 상담 후 권고하에 긴급으로 사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늘 했던 말들이 오갔고, 사실 당장 내일 정윤이와 푸꾸옥에 가기 위해 자낙스나 더 처방받을 수 있을까 하여 카운셀러의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내방했던 것뿐이었는데.


상황은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진행되었다. 입원 권유에 내가 정말 조울증 환우임이구나를 다시금 깨닫고 미친 듯이 오열했다. 그러던 사이 속전속결로 사내 주치의 선생님이 입원 추천서를 메일로 같은 계열사 병원인 대형 K병원의 정신의학과 선생님에게 보낸 눈치였고, 나는 눈물을 추스를 새 없이 진단서와 입원 의뢰서 봉투 두 개를 손에 쥐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일단 미친 듯이 울어재끼고 싶은데, 인사팀은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미연에 방지(추측건대 산재를 막기 위함인듯하다)를 위해 병원도 혼자 가라고 내버려 두질 않았다. 결국엔 인사팀 한 분과 집에 들러 짐을 꾸리고 한 시간 반정도 소요되는 K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자의지만 타의에 가까운 폐쇄 병동 입원의 시작이었다.




집에 들러 급히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담배 2개비를 몰아 피우고 눈에 보이는 책을 모두 큰 백팩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를 기록할 수 있는 분량이 남은 헌 공책과 볼펜, 혹시나 그래도 '자의 입원' 명목하에 조금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진 않을까 하여 노트북과 아이패드, 그리고 담배도 두어 갑 욱여넣으니 무게가 꽤 나갔다.


-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됩니다.


나를 회사에서 서울 K병원으로 데려다줄 의무, 즉 그런 인사관리가 주된 업무인 S님과는 무미건조한 대화가 몇 번 오고 가고는 멈추었다. 이렇게 울음을 꾹 참고 있는데 잠이 올리 없었다. 서울에 진입해서는 무슨 대교를 건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멋진 야경이 펼쳐졌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어서 온통 희뿌옇고, 불빛은 더 크게 번져 보였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응급실은 분주했고, 이것저것 시키는 일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S님은 기어코 내가 폐쇄 병동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가셨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내가 정말 걱정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산재가 그토록 무서운 것인지.



23.10.6 금요일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폐쇄병동은 별별 것들을 나에게서 뺏어갔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자해의 위험성 때문에 충전기마저 빼앗아갔다. '자의 입원'이란 명목하에 가져온 노트북과 아이패드, 담배까지도 모두 빼앗겼다. 물론 입원 중에 잠깐 보관을 하자는 것이지만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보안 요원이 폐쇄병동에 오면서 뭐 이런 거까지 들고 오냐는 눈빛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719호 창문의 블라인드는 쳐져있지 않았고 옆건물 동일층에 있는 스타벅스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인천 공항행을,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불금의 계획을 세웠을 나였겠지만 지금은 온갖 동의서에 동의, 동의, 동의, 사인을 연발하느라 그저 아무 곳에나 몸을 뉘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처방받아 들고 온 취침약을 받을 수 있냐는 질문에 간호사는 이전 약들은 일절 폐기될 예정이기에 오늘 밤은 근육 이완제를 주사한다고 했다.


- 제가 잠에 들 수 있을까요?

- 보통은 다 잠에 드세요.


몇 년째 약 없이는 잠에 들지 못했던 내가 걱정스레 물어보자 당직 간호사는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지만 나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알록달록 거리는 병실의 차창 밖, 그리고 너무 갑작스러운 밀물 같았던 입원 과정. 급한 입원으로 끝내 미리 연락을 전하지 못했던 친구들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정윤이에게 같이 여행은 못 가고, 결국엔 정신병동까지 오게 되었다고 전화했을 때 정윤이는 같이 울어주었다. 정윤이는 그 여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왜. 정윤이에게 너는 울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하고 싶었지만 당분간 나는 직계가족에게만 하루 3분, 3번씩만 전화할 수 있었다.


분명 그러니까, 12시가 지나버렸으니까. 어제 아침엔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다른 부서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나 자신이 조금이나마 조울을 덮어놓고 건강한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대체 나는 왜 이런 걸까. 수많은 자책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외롭지만 자유로움이 보장되던 집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밤은 예상대로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은 아침 7시면 불이 켜졌다.


내 취향과 맞지 않는 쨍한 백색등.


원래라면 푸꾸옥에 도착했을 시간. 혹은 연차를 쓰지 못했다 하더라도 출근 준비 시간이었다. 아침밥이 오기 전에는 그냥 원래 출근을 하던 것처럼 세수와 양치를 했다. 그리고 집에서 해왔던 것처럼, 세수 후에는 토너패드를 이마와 양 볼에 붙이고 10분간 피부관리도 해주었다. 최대한 건강하게 보이고 싶었고, 건강해지고 싶었고, 조속히 퇴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었다. 텅 비어보이는 얼굴, 그리고 푸릇함은 죄다 죽어버린 어색한 초록색 환자복. 그 둘의 뒤섞인 조합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불쌍해 보였다.


아침밥이 맛없는 것은 둘째 치고(병원밥은 늘 최악이다. 하지만 폐쇄병동에선 면회 시 직접 받는 음식이 아니라면 다른 환자가 주는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그게 아무리 작은 알사탕이라도 불가했다.) 누군가가 면회를 왔다 갔음이 분명해 보이는 다른 환자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져서 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밥을 퍼먹었다.


외로움은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막상 마주하면 다시 나를 무력화시켰다. 홀로였던 졸업식, 현장학습,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도 없었던 적막한 열아홉의 자취방, 쌓이고 쌓인 혼자였던 무수히도 많은 나날. 폐쇄병동의 면회시간은 30분 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저 멀리 지방에서 엄마 아빠가 오실지도 의문이었다.

급히 내가 한 마지막 연락에서 병문안이 가능하냐며 물어오던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오전 10시.


회진 시간. 입원을 하고는 첫 면담진료였다. 솔직해져야 일찍 맞는 약을 찾고 퇴원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이 흐르든 말든 내가 줄 수 있는 나의 모든 정보를 담당의에게 모두 드렸다.


불안도, 우울도가 어떻냐는 말엔 일단 실컷 울었으니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날의 면담은 내 인생 전반의 이야기, 써보았던 항우울제들, 이유 없이 20KG를 찌우게 만들었던 내가 경멸하는 약의 부작용에 대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증 상태가 심해보이는 여자아이와 같은 방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본인이 개천절날 신의 계시를 받았다느니, 대통령이 될 것이라던지.. 전형적인 조증 상태인데 아직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다.


남이 보면 똑같은 정신질환자겠지만 내 정신은 닳고 닳아 어떤 기분이나 생각이 들 때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의 내가 생각이 나서 그 아이와 같은 방을 쓴다는 게 괴로웠다.


아, 글을 쓰는 와중에도 미국에서 치대를 다녔단 그 애가 반대 병실 할머니에게 치실 사용법을 알려드렸다며 "난 역시 대단해!" 하고 한층 업 된 목소리로 방에 들어왔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글은 이만하고, 오늘은 가져온 책을 마저 읽고 병동 생활 계획표를 간단히 세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사실 잠을 3일 동안 제대로 못 자 육체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쉬고 싶단 생각 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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