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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우니 Feb 10. 2024

최상의 통치자

최상의 통치자는 아래 사람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인 군주이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최상의 통치자는 아래 사람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인 군주이며 다음은 아래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기려지는 군주이다. 다음은 아래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군주이고 최악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군주이다.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군주가 하는 말에 믿음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도 그 말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니 그저 느긋하게 말을 아끼고 있다가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고 나면 그때     

百姓皆謂我自然.

사람들은 저절로 그리되었다고 나에게 말한다.

(제17장)


 통치자는 백성들 일에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일이 잘 이루어진다. 백성들에 대한 간섭 대신 자율성을 부여하여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민간에게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한다. 민간에 대한 간섭은 오히려 인(仁)이나 의(義)와 같은 규제가 생겨나게 하고 백성들은 인과 의를 맞추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는 것이다. 민간에 대한 간섭은 국가가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하는 통치자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유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의 지도자들이 매번 이런 우를 범하고 만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그렇다.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은 1955년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이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일환으로 지시한 유례없는 대규모 해조박멸운동(害鳥撲滅運動)이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모택동은 1955년 농촌에 현지 지도를 나갔다가 지나가던 참새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교시를 내린다. 며칠 후 모택동과 전국 당서기들은 중국 농업발전을 위한 정강을 포고하는데, 이 정강 조항 가운데 4대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사해(四害)는 중국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4가지 해로운 것으로 파리, 모기, 쥐 그리고 참새를 말한다. 그리고 1958년에 전국적인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으로 이어진다. 결국 마오쩌둥의 한 마디에 중국의 인민들은 모두 참새를 잡는 데에 동원된다. 농촌에서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참새를 잡는 데 힘썼다. 하지만 모택동이 참새를 박멸하자 엉뚱하게 참새의 먹이였던 해충이 창궐한다. 식량 생산량은 오히려 추락해 버린다.

  참새를 사해(四害)에 포함한 것은 분명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추수기에 참새가 먹어 치우는 곡식의 양은 대량으로 발생하는 메뚜기를 제외하면 어떤 병해충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참새의 해악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파리, 모기 그리고 쥐 퇴치는 참새보다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만만한 참새 잡느라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이 제일해운동(除一害運動)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참새를 잡을 때는 그물이나 총을 사용하지만, 비효율적이고 치안 불안을 이유로 총 같은 것은 지급되지 않는다. 그냥 무식하게 특정한 날을 정해 참새가 앉을 만한 곳에 사람을 풀어 계속 시끄럽게 하거나 작대기를 휘두르며 땅에 내려앉지 못하게 했다. 참새들은 착륙을 못하고 탈진할 때까지 날다가 떨어졌다. 중국의 넘쳐나는 인력으로 말 그대로 나는 새도 떨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참새가 사라지자 나머지 파리, 모기, 메뚜기는 등 삼해(三害)는 오히려 미쳐 날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해(四害) 중 왜 유독 참새가 표적이 된 것일까?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은 전문적인 해충 구제 기술이나 장비가 동원된 것이 아니고, 당시 중국의 유일한 강점인 ‘남아도는 인력’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비교적 덩치가 있는 참새와 달리 파리, 모기는 무식하게 사람만 동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파리, 모기는 곡식을 먹지 않고, 쥐 역시 곡식을 먹기야 하지만 주로 창고에 있는 곡식 조금씩 간간이 훔쳐 먹는 동물로 인식될 뿐 대개 ‘위생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니 정책을 집행하는 당원이나 관료들 입장에서는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농업 생산량을 올리는 게 급선무이므로 당장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참새를 족치는 게 가장 그럴싸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아연실색할 정도다. 이러한 영예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민들이 몰래 파리, 바퀴, 쥐, 참새를 ‘길렀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부 농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참새보다 더 큰 새들을 잡아 자루 맨 밑바닥에 깔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제사해운동의 결과는 참담했다. 1958년 한 해 동안만 참새 2억 마리가 넘게 학살당해 거의 멸종 위기에 이르자, 참새가 잡아먹고 살았던 메뚜기 등 각종 해충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든 탓에 홍수와 가뭄이 발생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근이 닥친다. 이때 공식기록으로 최소 3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사했다고 한다.

  엄청난 수의 아사자가 나오자 결국 당 지도부는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흐르시초프에게 빌다시피 해서 연해주에서 참새 20만 마리를 공수해 오는 촌극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참새 도살극은 모택동의 “됐어” 한 마디로 겨우 끝이 난다. 이후 제사해운동은 참새가 슬그머니 바퀴벌레로 바뀐다.


  중국 역사 2천 년 동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고 있다. 제사해운동이 실패한 것을 두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자의 표현을 빌려서 설명해보면 모택동이라는 통치자가 17장의 4가지 통치자 유형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두려운 통치자’였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말을 아끼지 않고 현지지도를 한 결과이다. 모택동이 두려운 나머지 관리들은 가시적(可視的)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참새’에 집중했고, 인민들은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파리, 모기, 쥐, 참새를 ‘길러서’ 할당량을 채웠다. 

  중국 역사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군주는 고사하고 두 번째의 백성들에게 친근하고 기려지는 군주조차 없다. 거의 다 두려운 군주 아니면 업신여김을 당하는 군주 둘 중 하나다. 업신여겨지고 비웃음을 사는 군주가 최악이다. 차라리 두려운 군주가 낫다는 말이다. 사실 왕정(王政)을 하는 나라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한 군주와 친근하고 기려지는 군주는 있을 수 없다. 내부의 경쟁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통치자는 힘을 과시해야 하며 이곳저곳 다니면서 현지지도랍시고 교시를 내려야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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