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다스림
성인의 도가 큰 물처럼 범람하면 만물이 생겨나고 자란다
大道氾兮其可左右(대도범혜기가좌우) : 도가 마치 큰 물처럼 넘쳐 좌우 어디든 흘러들어 스며드니
萬物恃之而生而不辭(만물시지이생이불사) : 만물은 그것(도)을 믿고 생겨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功成不名有(공성불명유) : 도는 일을 이루고도 공이 있음을 드러내지 않으니
衣養萬物而不爲主(의양만물이불위주) : 만물을 입히고 먹이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
常無欲(상무욕) : 도는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可名於小(가명어소) : 하찮은 것에도 이름짓고
萬物歸焉而不爲主(만물귀언이불위주) : 만물이 모여들어도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으니
可名爲大(가명위대) : 위대하다.
以其終不自爲大(이기종불자위대) : 도는 끝내 스스로를 크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 큰일을 이룰 수 있다. (제34장)
도를 큰 물에 비유하고 있다. 큰 물이 범람하여 사방 구석구석 흘러들어 온갖 싹을 틔우는 모습이다. 도는 물이고 만물을 싹에 비유해서 씨앗이 물을 만나면 싹을 틔우는 것으로 성인의 도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성인은 무위자연의 원리를 알고 있는 군주이다. 그리고 성인의 무위자연의 다스림을 도라고 했다. 따라서 이런 군주가 다스리는 곳에는 만물이 생겨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성인의 무위자연의 다스림이 행해지는 곳에는 아주 작은 하찮은 것도 이름을 얻어 문물이 일어지만 성인은 그것을 내 덕이라고 생색내지 않는다. 그래서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으니 위대하다고 한 것이다.
성인의 다스림은 왜 문물이 일어나게 할까. 이 장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常無欲 可名於小'이다. 이 문장에 좀 더 살을 붙여보면 道常(使民)無欲 可名於小로 바꿀 수 있다. 성인의 무위자연의 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무욕케 해서 작은 것에도 이름 짓게 한다는 것이다.
그럼 다시 '無欲'은 무엇인가. 이걸 풀기 위해서는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1장의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구절을 풀어보면, 무욕하면 신기한 것을 보고, 반대로 유욕하면 그 경계만 볼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알 수 없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저자의 의도를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면 된다. 훈고학적 해석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無欲이라는 텍스트를 머신러닝의 학습이론 중 하나인 '비지도학습'으로 놓고 글을 다시 읽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비지도학습부터 알아야 한다. 머신러닝의 학습방법에는 지도학습, 비지도학습 그리고 강화학습이 있다. 지도학습은 말 그대로 정답이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신경망을 학습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데이터 하나하나에 일일이 라벨을 붙인 다음, 주어진 라벨링 데이터를 신경망이 카테고리 또는 특징에 따라 분류한 것을 학습하고 나면 이후 들어오는 데이터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게 하는 신경망을 학습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개와 고양이 사진에 개와 고양이라는 라벨을 달아서 신경망에게 주입시키는 것으로, 신경망에 상당히 많은 라벨링 데이터를 보여주고 나면 개와 고양이를 알아본다는 식이다.
반대로 비지도학습은 정답 라벨이 없는 데이터로 학습하는 방식으로 라벨링 되어있지 않은 데이터로부터 패턴이나 형태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지도학습에 비해 난이도가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대신 라벨링하는 사람의 의도가 없기 때문에 이전에 본 적 없는 패턴이나 트렌드,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지도학습(有欲)은 이미 입력 데이터에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가 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 그 경계만 볼뿐이며, 有欲은 이를 말한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 세계를 인식할 때는 마치 양자역학에서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빛을 입자라고 가정하고 보면 입자로 보이고 파동이라 가정하고 실험해 보면 파동으로 관측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라벨링한 데이터는 이미 라벨링한 사람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다. 이미 입자로 보기로 했기 때문에 입자로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라벨링하지 않은 데이터는 常無欲以觀其妙라 했듯이 정말 신기한 것을 보여 준다.
이제 '常無欲 可名於小'를 해석해 보자. 無欲을 '라벨링하지 않은 데이터'로 치환해서 읽으면 된다. 정답이 없는 데이터로부터 이름 없는 하찮은 것(小)에 이름(패턴, 트랜드)을 지을 수 있다. 이로써 이름 없던 것이 이름을 얻어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성인의 무위자연의 다스림이 문물을 크게 일으켜도 성인은 결코 내 덕이라 하지 않는다. 성인의 다스림은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그 소소한 삶에서 만물이 이름을 얻어 생겨난다고 한다. 위대하지 않은가.
19C 동아시아의 패배는 이와 같은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秦의 통일 이후 구축된 관료제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로서 지배층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는 용이하지만, 민간의 삶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앞서 말 했듯이 만물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 때 생겨난다. 기득권적 사회체제는 마치 내부를 향해 있는 철옹성 같아서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내부의 문물이나 신산업을 막기 위한 것이다. 원래 성벽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것이지만 관료제라는 철옹성은 내부를 향해 있다. 이 성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은 효과적으로 막아냈지만, 구한말 한 줌도 안되는 외부의 적조차 막기 어려운 구조이다. 필자는 지금도 이 구조는 해소되지 않았다고 본다. 성인의 도는 지배층의 기득권과 양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