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고찰
나는 왜 글이 쓰고 싶었을까? 가만히 앉아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왜 글이 쓰고 싶었어?
글을 쓰면 그 자체로 진실한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새해가 되면 버릇처럼 다짐하는 게 있다. 올해는 덜 삐그덕 대자. 생각한 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 변명할 여지도 없는 삐그덕 대는 나를 보며 도대체 얼마나 더 살아야 나 자체를 인정할 수 있을까 원망한 적이 있다. 실수라고 하기엔 남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을, 자연스럽기까지 한 '보여지는 나'를 나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내 생각 속의 나'는 군자 정도는 되는 것일까?
<관종의 조건>에서 저자는 '절대적인 진실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절대적인 진실성을 가진 사람은 나의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주장 대신 나를 자연스럽게 믿게 만들 수 있는 그 자체로 진실한 사람이다.'라고.
'나이고 싶지 않은 내 모습'과 '내가 사랑하는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싶다. 인정받길 바라고 증명해야 하는 일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진실인 사람, 나에게는 어렵지만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다. 그런 누군가를 동경하다가 나는 왜?라는 물음이 생겼을 때 더 이상 동경이 아니라 시기로 바뀐다. '좋은 사람'이 아닌데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갈망 때문이다. 글을 쓰면 진실한 사람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나를 내가 인정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성장하고 회복하고 싶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 마흔하나. 나에 대해서, 또 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는 게 아님'을 알고나서부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똑바로 보고 그 눈으로 나를 관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적으로 풍요롭고 싶다. 교양..이랄까. 지적허영심일 수도 있겠다.
백영옥의 <힘과 쉼>에서는 성장과 회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아는 게 아니라 알아내는 것이며, 있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내면이라는 복잡하고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 채굴하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이 고된 작업이 끝나면 마음을 건드리는 키워드가 남을 것이다.'
'지적 허영심은 사람들에게 더 똑똑해 보이기 위해 과시하는 마음'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자기 포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생긴 계기를 돌아보면, 알고 싶은 욕구와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허영은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 없이 겉모습뿐인 것'을 말한다. 지적허영도 허영이지만 뭐 나쁘게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오히려 좋다. '지적 허영심'때문에 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비교적 단조로운 일상에서 배울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내가 상상할 수 없던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은 단조롭던 나의 카테고리에 줄기를 달아 어떤 몽글몽글한 꿈을 만들고 그 꿈을 현실로 끌어당길 수 있게 돕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야망이라고 부른다.
공감. 감수성
한 때 광고기획자나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PC통신 하이텔 카피라이터 동호회에 질문을 올리면 카피라이터가 답해주는 동호회 게시판이 있었는데, 지방 시골 방구석에서 엄마 몰래 모뎀 켜고 겨우 연결된 인터넷으로 작은 꿈을 꾸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 광고 만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직접 같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생각쟁이'라는 닉네임이다. '생각쟁이'라고 지은 걸 보면 사물을 지나치지 않고 사유하려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깡시골에 살았던 덕분에 그 시절의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일상이 자연과 함께 있으니 소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집으로 가는 달빛이 이뻐서 문구를 떠올리며 TV광고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상상이지만 내가 만든 영상이 다른 이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것이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책은 도끼다>에서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라고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감동을 잘 받는 친구가 일을 더 잘하고 감동을 잘 받는다는 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누구나 공감을 원한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지만 사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나 자신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어쩌면 내 생각을 더 솔직하게 말하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취향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을 읽어주는 고마운 분들이 있지만 작업은 글이 게시되기 전에 이루어지므로, 난 허공에 대고 타이핑을 한다. '허공'이라고 말한 그분은 내 글을 꿰뚫고 있지만 나를 이해할 수 없다 핀잔주지 않고 과하게 위로하지도 않으며 부끄러울 워딩은 눈감아주기도 한다.
글 잘 쓰기 위한 조건, 카페, 그리고 가족
빵이 맛있을 것. 커피 향이 좋고 음악은 너무 크지 않을 것. 햇빛 비추는 자리에 콘센트가 연결되어있으면 금상첨화. 글은 키보드가 쓴다고 하지만 키보드만큼 열일해주고 있는 것은 커피와 빵이다. 자고로 좋은 글은 글쓴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고 박완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물론 중요한데, 빵과 커피가 들어가면 기억 끝에 머물러있던 생각들이 키보드 밖으로 뛰쳐나온다. 무엇을 먹고 있으냐도 중요하다. 포크로 빵 한쪽을 뜯어먹고 한 줄 내려가고 커피 한 모금에 두줄 써 내려간다.
문득 제대로 살고 싶어 지는 날(제대로가 뭘까), 일상이 소재가 되는 날, 안 쓴 날들에 대한 부채감, 브런치스토리 AI알람 등 결국엔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되고 어떤 글이든 내가 나일 수 있음에 몽글몽글해진다. 설렌다. 부채감으로든 어떤 것으로든 어느 날 불쑥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가족들에게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