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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Oct 22. 2023

자기 계발서 주입을 잠시 멈춤.

한병철의 [피로사회] 때문에,


# 사고시점과 그 전의 일.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회색 먼지로 자욱하다. 염원이 담긴 성공 기원탑에는 금이 갔다. 사방을 둘러싼 재는 심부까지 침투하여 내부 면역시스템인 회복탄력성을 손상시켰다. 사고발생 시점은 얇은 책 두께가 겨우 반 넘은 때. 자아의 어느 깊숙한 지점에서 벌어진 급격한 지각변동이었다. 한 번도 의문을 품어 보지 않고 믿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더 이상 흡수할 수 없는 크기의 진동이다. 도망치듯 말끔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식간에 눈꼬리에 뜨거운 것이 깊게 박혔고, 잠깐도 중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숨죽이고 달려 가르마 사이로 중첩된 물길을 낼 뿐이었다.



의심해 본 적 없는 땅의 무너짐을 경험한다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경고된 여진도 예고 없이 당할 뿐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다. 불규칙한 다수의 여진은 급습에 매번 성공했지만, 힘이 그전 같지 않았다. 모든 진동이 종료되었다는 게, 조금씩 실감이 나서야 주변을 살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겨버린 사고의 조각들은 모양만 살짝 다른 대체품으로 채워졌다. 미처 다 아물지 못한 생채기만이 유일한 증거로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사고상황을 알려야 했고, 어떻게 극복할지가 남겨진 과제였다. 완전하게 마무리된 건 아니다. 다만, 감정이 가라앉은 지금이 객관적인 사고현장 조사에 적합하다.






 나는 유용한 정보, 성공 경험의 글을 좋아했다. 책 내용의 지식 전환가능성 여부가 내게는 중요하다. 남는 게 있어야 가치가 있다. 속에 새겨진 것들은 앞으로 발전시킬 또 하나의 무기다. 비로소 성공에 한걸음 더 다가갔음을 느낀다. 자기 계발서는 자아의 아바타를 성장시키는 게임 아이템과 같다. 읽는 것만으로도 능력이 탑재된 기분을 준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몰랐으면 좋겠다. 혹시 나만 이제야 안거라면 끔찍하다. 그렇게 또 다른 신박한 아이템이 없나 325번 서가 주위를 돈다.



 독서도 연차가 쌓이면 어떤 틀이나 관념 같은 게 생긴다. 글로벌 인재를 꿈꾸며 고른 책들은 나라별 구분틀을 완성 지었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 성공신화는 아메리칸드림의 확장판이다. 어떤 영웅은 이제 4시간만 일해도 된다 주장한다. 또 다른 영웅은 원칙에 벗어난 성공은 없다며 제시된 조언과 함께 독자에게 성공의 손길을 내민다. 미국의 자기 계발서는 보통 작가의 성공팁과 혜택본 주변인의 성공 사례들로 구성되어 독자는 금세 그들의 삶에 매료된다. 누가 3일 동안 아르헨티나의 멘도사 와인 컨트리에서, 개인 비행기로 전담 가이드와 함께 눈 덮인 안데스 산맥과 넓은 포도밭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

 


  반면 일본 작가들은 요약된 핵심만 정확히 전달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소주제들을 짧은 호흡으로 이끌어간다. 두께도 얊은편이다. 미국의 3분의 1 정도. 그만큼 가독성이 좋아 완독 가능성이 높다. 읽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1시간 20분 정도라 단숨에 끝까지 가는 맛에 읽는다. 내용은 경험보다 구체적인 실천 목록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책 자체가 핵심 영단어장이다. 시험 보기 직전에 빠르게 보면 된다. 이처럼 자기 계발서와는 통하는 면이 많았다. 보이는 족족 아이템 마냥 먹어 치웠다. 온갖 부스터로 무장해 취업시장 속 매력적인 대어가 되어가고 있음에 만족했다.


그때 만났다. 사고가 발생한 시점이다.




# 사고상황과 잠정적인 해결책.


 고전은 메시지가 녹슬지 않는다. 이 책이 나온 지도 12년이다.(피해는 고작 몇 달 전이지만) 아직도 이야기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는 현시대를 피로사회로 명명한다. 이는 자기 착취의 사회를 의미한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다양성이 배제된 긍정의 폭력 속에서 저항의 에너지는 순순히 포기된다. 다시 말해, 성과시대의 주체인 우리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로 인한 과다한 노동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자기 착취와 다를 바 없음에도, 사실을 망각한다. 심지어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여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성을 발휘한다.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리되지 않는 현실이다.




 나의 경우, 취업시장 속 독보적인 상품이 되기를 소망했다. 자격증을 따고, 희망기업에 대한 공부를 했다. 일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운동습관을 유지했다. 어디든 건강한 마음으로 버티기 위해 명상도 꾸준히 실천했다. 어느 정도 루틴이 정착하는가 싶으면 권태를 느꼈고, 좀 더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신호였다. 모자라다 싶으면 자기 계발서 투입량을 늘렸다. 지시에 따라 행동으로 옮겨댔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에 거의 가까워졌다. 웬만한 건 다 맞췄다. 문제는 이렇다 할 결실이 없었다. 분명히 하라는 데로 다 했는데… 방문에 표를 붙였다. 새로운 습관과 유지하는 습관을 추적하기 위함이다. 기약 없는 거창한 성공보다 시각적으로 명확한 작은 성공의 기쁨을 누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삼켜질 테니깐.



 그래봤자 또 한 명의 지원자였다. 사실, 남들 다 있다는 이유로 '생각 없이' 자격증을 따고, 쉼 없이 달려왔음에도 첫 자유 시간 동안 '죄책감'은 떠나지 않았다. 주체 없는, 타인의 속도만 의식한 결과였다. 항상 내손에 키를 움켜쥐고 항해를 해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아니었다. 시야는 한정된 화면의 정보가 송출되는 시스템이었다. 자유로운 강제에 자발적으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책 초반의 우울증 같은 심리적 질병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한 긍정주의를 표방했던 게 문제였다. '부정적인 것의 비존재'만으로, 긍정명제에 무조건적 수용으로 일관했다. 한 번도 긍정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무엇이든 좋게 생각하면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긍정도 해가 될 수 있다는, 순간적인 내부 지각의 변동이 점차 거센 파동으로 출력된다.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 긍정의 위험성. 긍정 과잉이 동질성의 극단으로 번져 이질성이 배제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지나친 이야기일까? 이미 자기 착취 사회라는 말에 떠오른 각자의 회고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일의 노동 윤리는 겉모습에 부정성이 없다. 예외 없는 당연한 미덕으로 말끔히 포장된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일에는 늘 고통이 포함되지만, 원래부터 알았어야 하는 사실로 치부된다.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을 눈 감고, 생각 없는, 오직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기계로 적응해 간다.




 다시 사고 현장이다. 주체 없는 사유에 대한 진상을 알고 쓰러진 무의식의 구출이 시급하다. 말미에 긴급처방으로 '깊은 심심함'이 제시된다. 깊은 사색에 잠겨 눈의 부산한 움직임을 중단하고 집중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이 훈련은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중단하기 위함이다. 남들 다한다는 이유로, 마치 본인을 위해 웬만큼 생각해 본 걸로 치부했던 과거는 뒤로 둔다. 질문의 무게점을 의식적으로 끌어다가 옆구리에 둔다.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나' 도구화 시도를 탐지한다. 어떤 결정이든 지금 당장 완성할 필요는 없다. 충분히 심심함을 즐기자. 나는 쫓기는 감정으로 쌓아둔 자기 계발서 투여 시기를 조금 미뤄두었다. 깊은 심심함에 취할 수 있는, 잠시 귀퉁이에 앉아 사색에 머물 수 있는 책들을 가까이하고 있다. 피로사회에서 이사 갈 준비 중이다.



자기 계발 주입을 잠시 멈춤. 그런데, 이게 맞을까?


PS. 제목에서 혹시 의문점을 발견했는가?

        조금은 다른 시선과 함께 나는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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