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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Jul 18. 2024

스플리트

크로아티아

Monument to Gregory of Nin -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 Split Riva - Viewpoint to Marjan

 딱 식곤증이 오는 시간대, 포근한 햇살을 받아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힘겹게 스플리트에 도착했다. 호스텔 주인은 통상적인 경우와 다르게 내 또래 여자였다. 해가 떠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번에도 정리는 미뤄두고 바로 나왔다. 남쪽으로 5분 정도 걸어 내려오니 매우 거대한 금속 조각상(그레고리 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표정은 매우 엄격·근엄·진지해 보였지만, 그 자세와 비율이 뭔가 좀 엉성하여—굉장한 대두다—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름치고 되게 소박한 Golden Gate를 지나 좁은 골목을 걸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 도착했다. 이게 궁전인가 싶을 정도로 색이 단조롭고, 얼마 전에 지진 피해를 입은 것마냥 온전치 못한 구조물들도 여럿 방치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유럽 궁전들과 다르게 주 건물이라는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옆에 성 도미니우스 대성당이 있긴 했는데, 입장료가 꽤 비싸 들어가 보진 않았다. 후에 어떤 그림을 봤는데, 이 시내 전체가 하나의 궁전이었던 것 같다. 자다르도 스플리트도 휴양 도시임에도 고대 로마 시대 건축물들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 참 신기했다.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왼쪽 엄지발가락만 바래서 반짝인다 | 좁은 골목을 홀로 걷는 기분이 은근히 좋다 | 궁전치고 다소 휑하다

 계속 남쪽으로 내려와 Diocletian's Cellars를 통과하여 바닷가에 도달했다. 해안선과 평행하게 뻗어있는 Split Riva를 쭉 걸었다. 이날도 날이 맑아 자다르에서 보고 감탄했던 푸른 지중해는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하지만 다소 정적이었던 자다르와는 다르게, 사람도 많고 야자수들과 식당들도 있어 분위기가 더 활기찼다. 해가 지려하기 전까지 시내 내부를 마음이 내키는 대로 둘러보았다. 천 년은 훌쩍 넘은 건물들부터 10년도 안 되어 보이는 건물들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이 작은 도시에 몰려 있던 점이 신기했다.

자다르보다는 확실히 관광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 이날까지는 계속 날씨가 좋아서 바다가 더욱 예뻤다

 해가 조금씩 넘어가려는 기미를 보이자 슬슬 마르얀 전망대로 올라갔다. 사실 맥주를 한 병을 사가서 홀짝대며 감상하고 싶었으나, 시내에서는 길거리 음주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 얌전히 포기했다. 전망대에 도착하여 벤치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 빨간 지붕의 주택들과 그 끝을 알려주는 산 능선과 해안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몰은 기대만 못했다. 바다 뒤로 뉘엿뉘엿 저무는 해는 그저 평범해 보였고, 도시는 침침해져 특색을 잃은 기분이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가.

 살짝 실망한 채로 내려왔다. 내려오니 태양은 완전히 숨어버렸고, 건물들은 하나둘 조명을 켜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가 기대했던 스플리트의 모습이 나왔다. 짙은 청색의 하늘 아래 도시는 노랗게 물들었다. 잎들 사이에서 나오는 조명들 덕에 야자수들은 빛나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이 광경을 조금 더 오래 보기 위해 벤치에 앉아 30분 정도 멍하니 해안가를 구경했다. 과한 것도 부족한 것도 하나 없었다. 왜 유럽 사람들이 휴양지로 크로아티아를 선택하는지 알게 되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스플리트 시내의 모습 | 유난히 손을 잡고 산책하는 커플들이 많이 보여 외로움을 느꼈다

 혼자 감상에 빠져 있다 문득 돈을 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내내 끼니를 대충 때워왔고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식당에 갈 계획이 없기 때문에, 식당에서 제대로 앉아서 먹으려면 이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시내에 여러 식당을 기웃거리다, 대충 구글맵 평점이 좋은 Corto Maltese Freestyle food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내부 인테리어는 아늑했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더 이상 아늑함을 느끼지 못했다. 가장 저렴한 라구 파스타를 주문했다. 메뉴판에는 독특한 주석들이 있었다; bff(best food forever)과 mdfk(motherf*****). mdfk 주석의 선정 기준이 궁금하긴 했지만, 피곤하고 민망해서 물어보진 못했다. 음식 맛은 평범했다—분명 bff라는 주석이 달려있었는데 말이다. 포만감을 최대로 느끼기 위해 먹는 속도를 최대로 늦췄다.

 식사를 다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니 30대 느낌의 여자도 있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길래 대화를 오래 나누게 되었다. 피곤했지만 그녀의 취업 도전기를 한참 동안 들어주었다. 씻고 마트에서 사 온 맥주를 마시러 로비에 나왔는데, 아까 봤었던 숙소 직원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또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일랜드 사람인데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몇 달 동안 잠깐 이 호스텔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젊었지만 여행 경험은 훨씬 풍부해, 많은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같은 방을 쓰는 여자도 대화에 합류했다. 당시 크로아티아에는 코카콜라의 병 세척 문제가 한창 화두에 올랐었는데, 자기는 이 사실을 몰랐지만 다행히 다른 브랜드의 콜라를 사 마셔서 안심했다는 등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했다. 애당초 영어를 잘 못하는데, 단둘의 대화에서 여럿의 대화로 가니 버거워졌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면 고맙게도 상대가 나를 배려해 줄 수 있지만, 여럿이 대화를 나누면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번역 과정을 거치다 보니 타이밍을 계속 놓치게 된다. 한참 그녀들의 수다를 듣다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내가 거기서 영어 대화를 오랫동안 듣고 있을 수 있었는지 상상이 안 간다.

인테리어는 합격, 음식은 무난 | 숙소에서 찍은 스플리트의 밤

 스플리트도 시내 자체는 매우 작아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성수기에는 흐바르 섬도 다녀오고 하면서 오래 머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던데, 나중에 올 기회가 생기면 스플리트 주변 섬들도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11월은 관광객이 적어서 좋지만 그만큼 교통편이 희생해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전날까지는 좋았던 날씨가, 아침에 일어나니 흐려지고 얼마 안 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도 들려왔다. 안 그래도 두브로브니크까지 해안도로로 4시간이나 걸리는데, 점점 비가 더 많이 온다는 예보도 있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을 했다. 그녀들이 좋은 일자리를 얻길 바라며, 조용히 스플리트를 떠났다.


 술을 꽤나 마시고 이 글을 쓰는데 불현듯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었다. 셀카 속 환히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와 나 좀 잘생겼는데?"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그런 건지, 귀국 후의 삶이 고단해서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기 얼굴을 보고 저런 생각이 들 정도면, 정말이지 저 당시 나는 여간 행복한 게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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