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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월 Aug 23. 2024

필리핀의 콜로세움, 투계장을 가다

 15년 전, 형과 나는 현지인 무리 틈에서 우뚝 솟아나있었다. 하늘에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폭죽이 연신 터지고, 우리 형제는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지인들 중 절반은 하늘을,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 형제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필리핀 세부는 관광객이 많은 도시지만, 현지인이 사는 마을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외국인은 생소한 것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슬레이트 지붕 아래엔 하수가 지나는 도랑이 있었고, 그 도랑을 양 옆에 끼고 골목이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최대한 넓게 보이는 한 골목이 광장의 역할을 하여 폭죽구경을 하려는 마을 사람들로 빼곡히 채워진 것이었다. 날씨는 후텁지근했으며, 크리스마스 장식은커녕 불을 밝게 켠 집도 몇 없었다. 때문에 하늘의 불꽃이, 그리고 우리를 스케치하듯 세심히 관찰하던 마을 사람들의 안광이 더욱 밝게 빛났다. 그날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카레를 대접했던 학원 선생님, 앤은 몇 해 전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사망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서른 남짓이었다. 짧디 짧은 생애를 누린 그녀이지만, 우리 형제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한 사람이기에 형과 나는 이따금씩 그녀를 추억하곤 한다.

형과 함께 지냈던 빌리지

 우리 형제에게 필리핀 생활은 가슴 두근대는 모험의 나날이었다. 중1과 중3의 소년은 겁을 몰랐다. 우리는 홈스테이 아주머니가 잠들었을 시각에 몰래 계단을 타고 내려와 냉장고의 망고를 훔쳐먹고, 샷건을 든 가드가 있는 빌리지 밖을 나서 컴퓨터게임을 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에 가곤 했다. 한국에서 온 아이들보다 현지인 선생님들과 말이 잘 통했고, 생소한 것 투성이인 도시에서 서로만이 믿을 수 있는 듬직한 동료였다. 이때의 경험은 우리의 우애가 남다른 비결이면서, 성인이 된 후에 형이 “세부 가자.”라고 매년 조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올해 2월, 형과 나, 그리고 신대방에서 같이 살았던 형의 고등학교 친구인 성규형과 함께 세부를 향했다.


 “투계장에 가보고 싶다.” 성규형이 말했다.

 “투계장?” 친형과 나는 한 침대에 앉아 과자를 펼쳐놓고 먹으며 답했다.

 “어. 아까 마을에서 본 장닭이 싸움하는 닭이라드라. 좀 궁금하네.” 성규형도 과자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래요. 가시죠.” 잠시 일정을 계산하다가 내가 말했다. 형도 못 갈 것 없다는 표정이었다. 모두들 여행을 오기 전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감명 깊게 보고 온 참이었다. 기안84가 현지인의 문화에 한껏 어우러져 춤추는 모습이 떠올랐다. 관광객들만 방문하는 명소만 둘러보는 것은 그 나라를 진정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그들과 한데 어우러져 음미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 아니겠는가!

 낮에 현지인 마을 깊숙이 들어간 것도 실은 이러한 심산이 저변에 깔려있던 것이었다. 우리 형제의 추억여행에 흔쾌히 동행해 준 성규형을 위해서라도, 그저 그런 관광지가 아닌 색다른 체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예상대로 현지인 마을은 15년 전 방문했던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러앉아 그저 시간을 축내고 있는 아주머니들은 우리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오토바이에 걸터앉은 청년들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저들끼리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었다. 좁은 골목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힌 전신주와 하수가 지나는 도랑이 풍기는 악취, 여기저기 내걸린 빨랫감과 사납게 생긴 장닭이 생경한 경치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튿날, 택시 기사에게 투계장에 대해 물어본 우리는 그곳을 향했다. 투계장 건물은 엣 학교처럼 넓은 복도를 가진 곳이었는데, ㄱ자 형태의 기다란 복도 사이로 선풍기의 탈탈탈 돌아가는 소리, 닭의 꾹꾸우거리는 소리가 공명하는 공간이었다. 천장의 형광등은 열 개 중 두어 개만 켜져 있어, 한낮인데도 건물 안이 침침하고 어두웠다. 가이드를 자청하는 노란 머리의 남자가 우리를 복도 안으로 이끌었다. 남방계 특유의 두상을 가진 그는 입이 툭 튀어나와있었고, 동그랗고 큰 눈은 베팅을 할 것인지 묻는 사이에 우리의 행색을 살펴보느라 재빠르게 굴러다녔다. 우리는 단호히 "No betting. Only watching."이라 여러 번 말했음에도 그는 끈덕지게 베팅을 권유했다. 말이 통하지 않음을 감지한 우리는 대꾸하기를 멈추고 그저 앞을 보며 걸었다. 꺾인 지점에 들어서니 복도 중앙에 야구장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고, 그 위에 장닭을 저마다 애지중지 돌보는 계주(鷄主)가 여럿 있었다. 복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닭의 흙내가 짙어져 갔다.

 복도 끝에 다다르니 좁은 철문이 우리가 걸어온 곳을 향해 열려 있고, 그 안으로 짙은 회색 벽이 드러나보였다. 레슬링 선수가 링에 입장하는 모습을 구경하듯, 바글바글한 필리핀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제각각의 표정을 띠었다. 일부는 꼬레아? 재패니즈? 라며 국적을 묻기도, 일부는 눈을 홉뜨고 신기한 듯 관찰했다. 인파가 만든 좁은 통로를 따라 관람석에 앉고, 이제는 역으로 우리가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죄 남자로 빽빽이 들어찬 그곳엔 경기 진행요원, 기록원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박을 하러 온 한량들이었다. 경기장은 유리 칸막이로 닭이 싸우는 모습을 잘 지켜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닭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두었다. 흙이 옅게 깔린 경기장의 각 코너에 닭이 출전하자, 잡담으로 산만하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끄럽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기에 대한 기대와 응원이 만드는 환호가 아니라, 자신이 건 곳에 베팅하라고 외치는 소리였다. 

 장내가 떠나가도록 외치는 그 소리는 귀를 묵직하게 때렸다. 우리는 서로를 둘러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주고받았다. 시끄러운 와중에 진행요원은 입장한 투계를 맞붙여 서로 쪼아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1분 정도가 지나자 소리가 수그러들기 시작하고, 싸울 준비가 된 투계를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귀를 강타하던 함성의 빈자리를 엄숙한 고요가 채웠다. 경기장 안의 닭 두 마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푸드덕. 몇 번의 날갯짓과 함께 닭들이 부둥켜안았다가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그 몇 번의 어울림 끝에 닭 한 마리가 일어나지 못하고 철푸덕 주저앉았다. 몸을 일으키려 노력하는 사이에 몸이 뒤집어지고, 발라당 배를 보여주며 드러누워버렸다. 자세히 보니 배의 하얀 깃털 틈에서 붉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닭의 발뒤축에 달아둔 기다란 칼날이 보였다. 투계는 경기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함인듯한 그 칼날을 상대의 배에 깊숙이 꽂아 넣도록 훈련받은 것이었다. 결국 관통당한 닭은 고개를 떨구고 흙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한쪽의 승리로 경기가 마무리되고, 사체가 채 식기도 전에 진행요원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시체를 쓸어 담고, 바닥에 비질 몇 번을 하여 핏자국을 지웠다. 

 그렇게 한 경기가 삽시간에 나를 훑고 간 다음에야 깨달았다. 이곳에 오는 것은 곧 생명의 죽음을 보러 오는 것임을. 그저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어떤 곳일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재빠르게 움직이고, 튀어올라 날개를 힘껏 펼치던 생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숨을 거두고, 쓰레기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장내를 둘러봤다.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닭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진행요원은 벌써 다음 경기의 선수를 출전시켰고, 또다시 자신의 편에 베팅하라며 외치는 관중들의 함성 소리가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콜로세움을 즐기던 로마인들과 나 사이엔 커다란 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을 필리핀의 한 투계장에서 여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세 경기를 보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세 마리의 닭이 쓰레기가 될 때쯤, 더 이상 죽음을 목도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다음 선수를 보고 함성을 지르는 한량들을 뒤로한 채 경기장을 나서니 아까의 노랑머리 사내가 따라붙어 왜 이리 일찍 가냐, 나에게 팁을 주지 않겠냐며 씨부렸다. 나는 코웃음 치며 "Tip? HA!"라 대꾸해 주고 문 밖으로 나갔다. 이후 우리는 귀국할 때까지 관광객만 득실대는 관광명소를 여행함으로써 투계장의 피비린내를 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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