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뒤로 걷기 May 01. 2024

상견례와 4만 원짜리 양복

100만 원짜리처럼

11월에 큰아들 혼사를 앞두고 지난 주말 상견례를 했다. 양가 부모가 처음 만나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인지라 정장을 입는 게 예법에 맞기에 상견례 전 옷장에 있는 양복들을 이것저것 입어보았는데 마음에 드는 마땅한 것이 없었다.


작년에 34여 년 직장 생활을 은퇴하며 그동안 입었던 오래된 양복들은 대부분 버리고 몇 벌을 남겨 두었는데 그마저도 왠지 모두 구식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결혼식 때도 입을 정장이 필요하니 이번 기회에 양복을 하나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집사람 옷도 한 벌 살 겸 날을 잡아 청주 외곽에 있는 의류 전문 브랜드 L사의 아웃렛을 들렀다. 이월 상품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라 다양한 제품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낫겠다 생각하며 나가기 전 큰 기대 없이 1층 남성 용품 매장에 들렀다.


그곳 역시 제품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쪽 편에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양복들이 몇 개 있었다. 제품을 살펴보는데 판매원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허리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31인치라고 했더니 여기 있는 양복들은 그 사이즈만 있는 제품들이라고 했다. 


가격표를 보니 상하의 한 벌이 4만 원에 불과한데 최초 가격은 무려 135만 원이었다. 몇 년 전 생산된 이월 상품인 데다가 사이즈가 31인치만 남아 어쩔 수 없이 저렴하게 팔고 있다고 판매원이 묻지도 않는데 설명을 했다. 


만져보니 원단도 좋고 입어보니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8만 원에 두벌을 구입하였다. 50만 원 넘게 예산을 잡았는데 요즘 아이들 말로 득템을 한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동안 몸매 관리를 열심히 해온 덕을 이런 데서 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몇몇 지인들에게 양복 이야기를 하니 혼례에 입을 옷으로 4만 원짜리는 좀 적절치 않느냐 한다. 웃으며 “백화점에 파는 100만 원이 넘는 제품과 비교해 차이도 없고, 결혼식에 누가 입었는지도 모를 양복을 20만 원 넘게 주고 대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말했다. 


혼사를 위해 가격이 있는 양복을 구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도 아닌데 몇 번 입지도 않을 것이고, 품질 등에 차이도 없는 옷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하느니 차라리 그 돈을 아이 결혼비용에 보태주는 게 훨씬 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다 떠난 큰 평수의 집에 사는 것도, 부부만 이용하는데 큰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 등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실제 은퇴 후 평수가 작은 집으로 옮기는 걸 고민 중이고, 15년 된 차를 양도하고 신차를 살 때 다른 것보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었다.


반면, 지인 한 분은 은퇴 직전 선호하는 지역의 큰 평수 아파트를 분양받고 주택자금 부담 때문에 시간이 많아도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못하며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좋은 동네와 큰 평수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익숙함과 편리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한다.


사람마다 생각과 사는 방식이 다르기에 정답은 없다. 하물며 나조차도 젊은 시절에 가졌던 생각과 지금이 다를 진 데 다른 사람들 생각과 사는 방식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저 다름을 인정하고 행복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나의 경우,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에 도드라지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 보니 남들을 의식해 외형이나 형식에 얽매였던 적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형식보다는 실질을 점점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비록 4만 원짜리 양복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지만, 무언가 내가 내린 결정이나 판단, 그리고 사는 방식이 사회규범과 예절에 벗어나지 않고, 누군가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외형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인 걸 추구하는 게 슬기로운 삶이 아닌가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