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팸투어 후기, 긴 글 주의)
대통령 한 명만 바꿨을 뿐인데 나라 전체가 변한 기분이다. 그런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화되는 순간은 얼마나 큰 흔들림이 있었을까. 그 큰 변화의 시작, 조선 개국의 서광을 임실, 진안, 장수에서 찾아보았다.
평소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던 내가 이성계 역사 탐방에 끌렸던 이유는 마이산 때문이다. 처음 본 마이산은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리 많은 산을 본 건 아니었지만, 큰 바윗덩어리처럼 보이는 게 산이라니. 그 앞에 쌓여 있는 돌탑은 또 어떻고. 그 뒤로 두세 번은 더, 특이한 볼거리가 필요할 때면 마이산으로 향했다. 8년 전 페북 프로필 사진으로 장가계와 요세미티 사진 사이에 마이산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올릴 정도로, 내겐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작정해야만 갈 수 있는 마이산 주변에 알고 있는 곳은 임실치즈테마파크 정도였다. 그런데 상이암, 뜬봉샘처럼 내가 몰랐던 곳을 알게 된다면, 훗날 가족과 함께 갈 여행지가 넓혀지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성계 역사 탐방의 의미는 충분했다.
상이암과 은수사, 두 곳을 가기 위해서는 든든하게 먹을 필요가 있다. 먼저 들린 곳은 임실치즈테마파크. 해마다 변화를 주고 있었는지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내가 여길 왔었나 싶을 정도로 새로웠다. 장미와 유럽식 정원 그리고 유럽식 건물들. 치즈를 만드는 곳에서 먹는 피자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피자 한 판, 스파게티 한 접시를 먹고 나서야 성수산과 마이산에 오를 체력이 준비됐다.
성수산은 다양한 등산로가 있다. 그 중심인 상이암으로 가기 위해서는 굽이쳐 올라가는 길을 한동안 걸어야 한다.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닦아 놓은 길을 걷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그 옛날 이 우거진 숲길을 올라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단단한 각오가 뭉쳐 있지 않았으면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에 지친 몸을 끌고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환희담’에서 기도를 드리며 앞으로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거다. 환희담은 왕건이 고려 건국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얻은 부처님의 영험에 대한 기쁨으로 바위에 새겨 놓은 어필(御筆)이다. 이성계 입장에서 건국을 위한 기도처로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었을 거다.
성수산에서 내려오는 아홉 줄기의 지맥은 상이암 앞에 있는 향로봉이란 큰 바위를 향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 아홉 개의 지맥이 향로봉이라는 여의주로 향하는 용과 같다 하여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이란 표현을 쓴다. 그런 기 때문이려나. 올라가는 길에 여러 줄기로 힘차게 뻗은 나무가 툭툭 나타났다. 이런 영험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도 간간이 보였다. 정성스럽게 쌓아 놓은 소원들은 모두 이뤄졌을까. 고려나 조선이 탄생한 것처럼.
포장된 길 옆, 옛 돌길로 올라가다 보면 삼청동(三淸洞)이라 쓰인 암각을 모셔둔 어필각이 가장 먼저 맞이한다. 왕건이 환희담(歡喜潭)이란 글귀로 영험을 얻은 기쁨을 간직한 것처럼, 이성계 역시 이곳에서 얻은 깨달음과 하늘에서 세 번이나 들려오는 '왕이 되리라'는 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삼청동이란 글귀를 새겼다.
상이암은 알고 보면 곳곳이 흥미롭다. 산신각의 탱화에는 익선모를 쓴 산신이 있는데, 그 익선모에는 음양을 표현한 흰 원과 붉은 원이 그려져 있다. 그의 뒤로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봉우리들이 어좌 뒤에 놓인 일월오봉도를 떠오르게 한다. 무량수전 앞에 곧게 뻗은 화백나무는 구룡의 정기를 받았는지 밑줄기가 아홉 개다. 무량수전 뒤에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도 햇가지가 뻗어 나온 모습에 신비롭기까지 하다.
곳곳에서 왕의 기운을 느끼며 돌탑 위에 돌 하나를 얹었다. 이런 곳에서 사사로운 소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나. 두 손을 모으고 정성껏 마음속으로 소망을 말했다.
‘앞으로는 나라 걱정 때문에 광장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주말의 마이산은 돌탑에 쌓인 돌만큼 관광객으로 붐볐다. 이런 인상적인 곳에 사람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한 번은 본가, 또 한 번은 처가와 함께 왔었다. 그들 중에 이곳이 처음인 일행이 있으면, 마이산과 첫 대면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먼저 입을 반쯤 벌리고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와’라는 짧은 탄식이 나온다. 곧이어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연신 눌러댄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탑사는 매번 갔었기에 북적한 탑 주변을 피해, 오른쪽 언덕길을 따라 은수사로 향했다. 아래서는 반만 보이던 굴곡진 타포니 지형 사이에 얹힌 불상들이 돌탑의 작은 돌처럼 마이산을 받치고 있는 듯했다. 촘촘히 우거진 나무는 커튼처럼 탑사를 가렸다. 푸름 속에 숨구멍이라도 생겼나 싶더니 정돈된 탑사를 뱉었다. 옆에서 보는 탑사가 여유로워 보였다. 은수사로 오르는 이 길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화 상대가 두세 번 바뀌었을 무렵,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조화로운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 가꿔진 정원과 어우러진 모습,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모습은 아닐까. 30년 동안 이곳 정원을 가꾸고 있는 보살님의 허리는 암마이봉처럼 굽어 있었지만, 뿌듯함이 묻어난 어깨는 수마이봉처럼 봉긋했다.
이성계가 마신 샘물이 은처럼 맑았다 해서 이름 지어진 은수사는 암 수마이봉이 양쪽으로 버티고 있는 탓에 상이암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줬다. 하지만 이성계와 연결하다 보니 상이암과 유사한 면이 많아졌다. 이곳에도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가 있다. 상이암의 그것과는 다르게 곧게 자라고 있었다. 추운 겨울, 나무 아래 물그릇을 놓고 있으면 역고드름이 자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산신각에 놓여 있는 금척수수도(金尺授受圖)는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할 때, 산신에게서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금척을 받았다는 건국 설화를 보여준다. 게다가 마이산 산세와 겹쳐 보이는 일월오봉도가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충만해진 마음으로 어둑해진 산길을 내려가는 길에 암마이봉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이 보였다. 울긋불긋 단풍 질 무렵 산 위에 올라, 은수사를 내려 보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뜬봉샘. 이 직관적인 한자와 우리말의 조합으로 추측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다. 예상대로 봉황이 떠(날아) 간 샘터가 맞다. 이성계와 연결해 조금 더 풀어보면, 신선이 춤을 춘다는 신무산(神舞山)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이성계는 백일째 되던 날 골짜기에서 무지개가 떴고 그 위로 봉황이 떠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들여오는 ‘새 나라를 열라’는 계시. 무지개를 따라간 봉황이 뜬 곳에는 작은 옹달샘이 풀숲에 덮여있었다. 한 번의 계시만으로 역사의 큰 줄기를 바꾸는 것은 이성계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나 보다. 상이암, 은수사에 이어 이성계를 만나러 뜬봉샘으로 향했다.
이곳은 설화적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질적 이야기도 가지고 있다. 금강의 발원지다. 이 작은 뜬봉샘에서 시작한 금강 물줄기는 장수, 진안을 거쳐 대전, 대청댐을 지나고 공주, 부여에서 결국 군산 앞바다까지 흘러간다. 뜬봉샘생태공원을 시작하는 초입에 이 물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파란 하늘 아래 수선화가 핀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이 무지개를 따라가는 기분이다. 동고비의 지저귐과 오색딱따구리의 둥지 만드는 소리도 내가 도심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즘,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설화에 어울리게 매미꽃과 족제비고사리가 신비롭게 둘러싸고 있는 샘터가 나왔다.
샘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물은 돌 바가지에 잠시 머물다 수분마을을 향해 흘러간다. 돌 바가지에 고인 물로 데워진 몸을 식히고 금강과 섬진강으로 물길이 나뉜다는 수분(水分) 마을로 천천히 내려갔다. 설화와 실화만으로도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 마을은 천주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신유사옥 이후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인의 피난처였다. 한옥으로 지어진 수분 공소는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마을회관에는 정갈한 이 마을이 가지런히 상위에 올라왔다. 장떡과 고사리, 이곳에서 자란 나물에 구수한 우거지 된장국까지. 마을 카페에 들러 얼음 가득한 오미자 음료를 마시는 순간에 ‘이건 사 가야 해’란 생각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집으로 돌아가 조금씩 낮아지는 원액이 아쉬울 때가 오면 식구들에게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마이산 갈까? 근처에 내가 좀 아는 곳이 있거든.”
오늘 연재를 마무리 못해서 올리지 못했네요. 아쉬운 마음에 지난 한 주 공 들였던 팸투어 후기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