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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지 Nov 08. 202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쓰는 성장일기> by 빅이지

2021년 8월 뉴욕으로 발령을 받았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자리라, 지원은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내가 뉴욕에 가게 되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뉴욕이 안되면 휴직하고라도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나와 남편은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3년 동안 기러기 생활을 했고, 코로나19로 여행마저 제한되어 8개월째 얼굴도 못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로에 대한 서운한 마음과 오해가 계속 쌓였고 한번 싸우면 거의 한 달 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살다 간 제대로 된 결혼 생활도 못해보고 끝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뉴욕으로의 발령은 나에게 부푼 기대감과 희망을 주었다. 커리어적으로도 언젠가 한 번은 꼭 와보고 싶은 자리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남편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좌절도 큰 법일까? 뉴욕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만큼 녹록지 않았다. 일은 기존에 하던 업무와는 완전 다른 성격의 업무를 맡아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고, 같이 살면 금방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편과의 관계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매일 야근하고 밤늦게 돌아와 남편과 지칠 때까지 싸우는 일이 반복되었다. 남편은 나 때문에 모든 걸 정리하고 뉴욕에 왔는데, 내가 매일 밤늦게 돌아오니, 홀로 집에서 나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서운했고, 나는 남편 때문에 뉴욕에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내가 힘든 건 생각하지 않고, 본인 서운한 것만 이야기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뉴욕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일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어에 대한 부담감은 있었지만, 기존에 해왔던 게 있기 때문에 금방 적응해서 척척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자꾸 실수를 하게 되었다. 실수가 반복될 때마다 나는 자책했고, 내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 점점 위축되어 갔다. 살면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기에, 남편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 하지만 남편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까지 왔는데 코로나19로 불확실한 미래가 길어지다 보니 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까지 옆에 없으니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서로의 노력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렇게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더 많이 싸우게 되었던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업무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남편도 직장을 구하고,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면서 우리의 뉴욕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 되어갔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과 내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해 온 나였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누군가의 주머니를 불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운이 좋아서 승진도 빨리 했고, 누구나 한 번쯤은 오고 싶어 하는 뉴욕에 까지 왔으니 나름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더 열심히,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뉴욕에 온 이후로는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몇 날 며칠을 회의하는데, 가시적인 성과는 하나도 없고, 그저 미사여구들이 난무하는 말 잔치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나는 점차 거대한 관료주의와 비효율적인 업무 관행에 지쳐갔다. 또한 주변에서는 뉴욕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가 멋지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내가 가진 타이틀에 비해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저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기분이었다. 겉은 번쩍번쩍 빛나고 화려 하지만 속은 텅텅 비어 내실은 하나도 없는.


사실 뉴욕에 오기 이전부터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점점 없어졌다. 연차가 쌓이면서 일은 더 많아졌고, 매일 야근에 주말까지 반납해 가며 일해도 늘 남는 건 최고의 성과가 아닌 최선의 결과였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으니 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나는 점점 기한에 맞춰 일을 쳐내는 로봇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나는 회사의 부속품일 뿐, 내가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지난 1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고 좋은 경험도 많이 쌓았지만, 내가 이 회사에서 성장할 수 있는 건 여기 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 혼자 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10년 후에는 뭐가 되었든 내가 이룬 것이라고 온전히 말할 수 있는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아직은 뭘 해야 할지,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도 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하지만 무섭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있다가는 내가 왜 이 일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사명감도 열정도 다 잃어버리고, 때 맞춰 승진하면 그저 좋은 인생을 살게 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순간에 나는 늘 해보는 쪽을 선택해 왔다. 일단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한 것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잘한 선택이 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얘기지만, 적어도 지금 한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 삶에 안주하기엔 나는 아직 너무 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2023년 11월 2일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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