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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솔부는 책바람 Nov 03. 2023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습니다.

[책리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 민음사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

저는 예지자 랭보의 이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는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131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진 파브로 네루다의 시와 인생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 ‘일 포스티노’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94년에 영화 '일 포스티노'가 제작되기도 했다.

칠레의 작은 어촌 마을인 이슬라 네그라를 배경으로 파브로 네루다가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던 시기를 기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파브로 네루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허구의 캐릭터이다.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 파블로 네루다

그의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 (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이다.



7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21년 『축제의 노래』로 문단에 데뷔했다.

네루다는 다양한 종류의 시를 남겼는데 남미 역사를 소재로 한 서사시,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 일상적인 사물에 바치는 송시, 현실의 부정적인 요소를 비판하는 초현실주의 시 등 이 있다.



그의 시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설득력을 갖추었고 이러한 이유로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사회주의자였던 네루다는 평생 동안 정치적 망명생활을 했으며 1973년 9월 23일에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17세의 마리오 히메네스가 세계 각지에서 온 네루다의 우편물을 전담으로 배달하면서 시를 통해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을 키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작품은 유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메타포의 향연을 펼치며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칠레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저자의 말대로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맛보게 된다.



1970년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더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때 파브로 네루다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지만 네루다는 살바도르 아옌더를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옌더는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하고 칠레의 구리광산을 국유화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다국적기업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미국의 닉슨 정부에게 위험으로 여겨졌고, 미국은 칠레의 경제를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아옌더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결국 1973년 9월 11일 미국을 등에 업은 아우구스트 피노체트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살바도르 아옌더 대통령은 목숨을 잃게 된다.

이로 인해 칠레의 사회주의 정부는 3년 만에 종식된다.



이후 피노체트에 의한 군부 독재 정권이 칠레를 지배하는 암흑의 역사가 17년 동안 이어진다.이 기간 동안 정치적인 억압과 인권침해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되는 등 비인도적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17살의 마리오는 영화를 보거나 하루 종일 빈둥거리기 좋아하는 청년이다.

마리오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우체국에 취업을 하게 되고 칠레의 국민 시인 네루다에게 오는 우편물을 전달하는 일을 맡게 된다.



네루다의 멋진 헌사가 들어간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던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집을 매일같이 들고 다니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아뿔싸!!~ 어느새 시인의 시를 다 읽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제가 시인이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 있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바로 그게 문제라니까요. 시인이 아니라서 그것조차 말할 수 없는걸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28~29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메타포로 이루어졌음을 배우게 된다.

시를 알기 전에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언어의 이면에 담긴 메타포의 세계를 깨닫고 시의 본질을 알아간다.



※ 메타포 (metaphor) :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 < 출처 : 네이버 백과>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85



마리오는 첫눈에 반한 베아트리스에게 네루다의 시를 인용하여 사랑을 속삭였고 이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

사랑의 감정에는 자연스럽게 메타포를 품고 있기에 마리오는 단순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 메타포의 세계를 풍부하게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 우파 정치인의 세련된 태도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밝히던 마리오의 모습은 분명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우던 예전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변화였다.



마리오는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고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 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바다가 아쉬워.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주게.

(중략)

그다음에는 바윗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주고.

밤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85



주파리대사로 임명된 네루다는 자신의 집을 그리워하며 이슬라 네그라의 모든 소리와 심지어 밤하늘의 침묵까지 녹음해서 보내달라고 마리오에게 부탁한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위해 소리를 엄선하고 녹음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평범한 일상과 자연의 소리, 그리고 밤하늘의 침묵이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 깨닫게 된다.



네루다에게 최상의 것을 선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마리오는 자신의 시와 아들의 울음소리까지 녹음기에 담는다.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까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하려니.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158



프랑스에 있던 네루다가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칠레는 쿠데타가 발생하고 아옌더의 측근들은 붙잡히게 된다.

네루다 또한 군부의 삼엄한 감시 속에 지내다가 쿠데타가 일어난 지 12일 만에 사망하게 된다.그리고 다음날 새벽  번호판 없는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에 의해 마리오마저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하셨을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바다처럼 말이지!"

"네. 그래요. 바다처럼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중략)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p.31



소설은 평범한 한 청년이 시의 본질을 깨닫는 중에 알게 되는 새로운 세상을 한없이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리오가 베아트리스를 얻기 위해 장모와 벌이는 눈물겨운 투쟁은 독자들을 배꼽을 잡게 만든다.



글을 모르는 마리오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책이 네루다의 시집일 정도로 네루다는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불안정한 사회와 암울한 역사 속에서도 칠레 사람들은 네루다의 시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으며 네루다의 시는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 칠레의 역사와 네루다의 삶을 알고 나니 소설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란 결국 삶의 모든 것에 애정을 갖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매개체인 듯하다.



시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을 깊이 경험하고 밤하늘의 고요한 소리에도 귀 기울 수 있는 오늘을 기대하게 만드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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