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하얼빈 / 김훈 / 문학동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에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하얼빈 p.305 (작가의 말中)
안중근의 고단한 청춘을 소설로 써보는 게 내 고단한 청춘의 꿈이었다.
하얼빈 p.305 (작가의 말中)
최고의 문장가 김훈 작가의 『하얼빈』
김훈 작가는 청년 시절에 안중근 의사의 신문조서를 읽고 안중근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언젠가는 소설화하는 것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작가가 50년 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이끈 것은 안중근 의사의 신문조서에 나오는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세 단어였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성사시킨 후 일본인 검찰관의 직업에 관한 물음에 안중근은 '포수'와 '무직'이라고 대답했고 거사를 함께 도모했던 우덕순은 '담배팔이'라고 답한다.
을사늑약 체결 후 대한 제국의 행정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적인 사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끌었던 인물들은 이렇게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행동이 있었기에 현재 번영을 이루고 있는 우리나라와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민족의 영웅이자 독립운동의 상징인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소설화한다는 것은 대작가 김훈에게도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기에 50년의 고뇌 끝에 내놓게 되었고 그만큼 하얼빈이라는 작품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하얼빈』의 문체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간결하다. 작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많이 배제한 채 안중근이라는 영웅적인 서사보다는 나라를 잃은 평범한 청년의 모습에 집중하며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을 정도로 종교적인 가치관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이유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한 것이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이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얼빈 p.238
이토의 문명개화 저변에 깔린 일본정부의 정치적 야욕과 한반도를 발판삼아 일본의 번영을 도모하고 약육강식의 논리로 세계를 식민화하려는 속셈을 만국에 알리고자 했던것이다.
자신과 가족에게 닥칠 운명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조국을 위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안중근과 우덕순의 태도와 재판장에서 이토를 저격한 이유와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하는 안중근의 모습에서는 당찬 청년의 패기가 느껴졌다.
재판장에서 주어진 발언권을 자신의 신변을 변호하기 위해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안중근은 일본 정부의 형식적인 재판으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담은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써 내려갔지만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면서 '동양평화론'은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죽으면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자신의 묻힌 무덤을 통해 한인사회가 다시 한번 일어나길 바라며 대한 독립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염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정치적 함의를 들여다보았고 그의 무덤이 반일감정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유족에게 유해를 넘기지 않고 여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는다.
일본 정부에게 안중근이라는 인물은 그만큼 위협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했고 그의 소망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해전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되면서 우리나라 영공에서 전투기 6대가 호위 비행할 때 가슴 뭉클했던 기억이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찾게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 팔도는 고요했다. 순종은 그 고요의 바닥이 두려웠는데,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순종은 살길을 생각했다.
조선의 살길과 황실의 살길과 백성의 살길은 겹치고 또 부딪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살길은 슬픔에 있었다.
이토를 죽인 조선인의 범행은 황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황실의 지주이며 황태자의 스승인 이토 공작이 서거한 지극한 슬픔과 그 범인이 극악한 인간 말종이라 할지라도 한국 황제의 신민이라는 참담한 두려움을 속히 내외에 공포하고 조선의 슬픔으로 일본의 분노를 위로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살길은 저절로 떠올랐다.
하얼빈 p.170~171
안중근의 거사 성공과 이토의 죽음 앞에 국가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앞다투어 사죄단과 위문단을 꾸렸고, 천주교 교단에서는 안중근의 신자의 자격을 박탈한다. 그리고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기쁨의 함성조차 낼 수 없었다.
민족의 영웅이라는 타이틀 아래 가리어져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던 것 같다.
거사를 앞두고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하얼빈으로 불러들였던 일, 거사전에 가족을 만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고백하는 모습, 사형을 언도받고 가족의 거취에 대해 동생에게 전하는 모습에서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고뇌가 전해져온다.
책을 읽는 내내 나라면? 이라는 질문을 유독 많이 던졌다.
그리고 안중근의 거사 이후 직계가족과 문중들이 겪은 고초와 안중근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자녀들의 행보에 마음이 아파왔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라도 그가 남긴 빛나는 신념과 헌신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전한다.
"언제든 국가로부터 도움받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국가에 바칠 수 있다" 제63회 현충일 추모식에서 국가의 책임을 강조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코레아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