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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Mar 31. 2024

나쁜 피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5

    

내 생에 남자가 쫓아온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30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 밤. 회사 사람들과 회식을 하고 택시를 타러 가던 길이었던가. 거기가 종로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며 꽤 취했던 것 같다. 어떤 남자가 옆에서 말을 건다.     


“저....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얘가 눈이 삐었나? 보통 젊고 예쁜 여자한테 이런 수작을 걸지 않나? 그때 내 나이 스물여덟 살. 젊긴 했지만 키도 작고 못생 평범하게 생긴 데다가 남자애처럼 야상점퍼 같은 걸 입고 다니던 나에게 그런 작업 멘트는 날리다니. 무섭다기보다 놀라워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누구라도 붙들고 수작을 걸고 싶은 자였을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밤이 너무나 외로운 슬픈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음험한 욕심에 아무 여자나 붙들고 뭔 짓이라도 하고 싶은 나쁜 놈이었을지도 모른다.     


술 한잔 하자던 그 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의문은 좀 풀렸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키가 너무 작았다. 그래서 만만하게 저보다 키가 더 작은 내게 말을 걸었겠지.

집에 갈 거라고 손사래를 치는 나를 졸졸 쫓아오던 그와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뻘쭘하게 나란히 서 있게 됐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잘생기신 분이 왜 나이도 많은 저한테 말을 거시나요? 다른 멋진 분들 놔두고.”

“네? 아, 제 또랜 줄 알았어요, ....그쪽도 예쁘신ㄷ..(왜 말 끝을 흐리냐, 이 자식아)”

“혹시 연예계로 나가실 생각 안 해보셨어요?”

“아, 저도 노력은 해봤는데 키가 작아서 잘 안 되더라구요.(그랬구나, 그래, 그놈의 키가 문제다)”

“몇 살이세요?”

“스물네 살이요.”     


저는 스물여덟 살이고 애기 엄마예요, 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혹시 레오 꺄라, 라고 아세요?” 라고 물었다.     

“레오..? 모, 모르겠는데 그게 누구예요?”

“<나쁜 피>라는 영화를 만든 프랑스 감독이에요.”

“아, 네(연예계로 나가고 싶다는 거 맞냐)...”

“레오 꺄라가 첫 영화를 만들었을 때 스물네 살이었어요.”

“......”

“스물네 살 멋진 나이에, 이렇게 잘생긴 분이, 거리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말 걸지 말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셔야지요.”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면서 난 그 녀석 어깨를 툭 칠 뻔했다. 사실 그땐 한 월간지 기자로 일하고 있었지만 전직은 교사였거든.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 귀가하는 대학 선배에게 신입생 후배가 하듯 고개를 깊이 숙여 안녕히 가시라며 인사를 했다.

     

영화감독 레오 꺄흐라

남자중학생들을 한 5년 가르치다 서울로 온 해였다. 1994년. 이미 결혼도 했고 아기가 하나 있는, 앞날은 불투명한, 젊지만 불안했던 나는 혼자 <나쁜 피>를 보면서 2/3를 졸았던 것 같다. 대개의 프랑스 영화처럼 서사는 부족하고 설명은 불친절하며 이미지가 앞서는 난해한 영화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하루 다섯 시간밖에 못 자면서 육아와 가사, 직장생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시간이 나면 서점과 박물관, 영화관을 다니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려 애썼던 시절이었다.     


레오 꺄라(Leos Carax). 심지어 본명도 아닌 그 이름을 한국에서는 보통 레오 카락스, 라고 표기한다. 심지어 레오스 카락스라고 쓴 것도 봤다. 프랑스어는 맨 마지막 자음을 발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레오 꺄라, 아니, 꺄흐라? 라고 읽어야 맞다. 본명인 알렉스가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본명은 대신 <퐁네프의 연인> 남자 주인공에게 준 이 영화 감독의 여러 면모가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몇 살 많은 내 또래의 이 중구난방의 영혼을 가진 그의 막 개봉한 영화에 괜히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음울하고 비참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그러나 슬프고 아름다운 삶의 의미...... 최승자의 시를 밥 삼아 살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나저나 프랑스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마지막 자음을 발음하지 않은 걸까? 따져 물은들 그들은 이유를 알까 싶다. 스페인어 봐라, 얼마나 정직하냐. 어딘가 묘하게 닮아 있는데도, 비슷한 단어가 많은데도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는 엄청 다르다. 스페인어는 그냥 글자 그대로 읽으면 된다. 마치 한글이 ‘ㅏ’ 는 언제나 <아>라고 읽으면 되듯이 스페인어의 ‘a’는 무조건 <아>라고 읽는다. 영어처럼 원칙도 없이 규칙도 없이 a가 ‘아, 에, 에이, 애, 으’ 등등 제멋대로 읽히지도 않는다. 물론 읽기 쉽다고 문법도 쉬운 건 아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한글 자모 40개를 배울 때 신이 나서 금방 이 동아시아 언어를 섭렵할 것처럼 들뜨던 서양인들이 문법을 배우고 특히 조사와 어미를 배울 때 '아예 이 길로 접어들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다더라.      

스페인어는 발음이 착하지, ~주 투명해!

선명하고 정확한 스페인어, 심지어 어렵다고 하는 g 와 j. 우리 15세기 고어에 있는 쌍히읗 같은 발음으로 <ㆅㅖ>, 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혀를 많이 굴려야 하는 rr(에ㄹㄹ레, 이렇게 읽는다) 발음조차도, 원어민들은 이방인들이 이런 발음들을 꼭 정확히 발음하지 않아도 대부분 알아듣는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picante는 글자 그대로 피깐떼(맵다)이고 스트레칭을 뜻하는 estiramiento는 엄청 어렵게 생겼지만 글자 그대로 ‘에스띠라미엔또’라고 읽으면 된다.

그러니까 알렉스 크리스토프 듀퐁 Alex Christophe Dupont이 스페인에서 태어났다면 예명을 썼더라도 ‘레오스 까락스’라고 읽어도 되었겠지. 그는 알까, 한국에서 그의 프랑스 이름은 제대로 불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나저나 감독님 요즘은 뭐하시나. 당신도 쓰라리던 청춘을 지나고 이제 조금 명성과 안락을 얻어 더 이상은 영혼이 피 흘리는 영화는 안 만드는 걸까. 내가 더 이상 최승자의 옛 시를 읽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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