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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May 16. 2024

온 몸으로 듣다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8



스페인어로 '듣다'는 escuchar다. 영어 공부하면서  listen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하는 것만큼 스페인어 공부에서도 그런다.


잘 듣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귀는 열려있으되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느 저녁에 아들, 딸과 함께 셋이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이 취업 시험에서 떨어지고 그 발표를 보고 난 후였다. 셋이 거실 의자도 아닌 마룻바닥에 눕고 쪼그려 앉아 수다를 떨었다. 


LIsten to you

거의 붙는 줄 알고 일주일을 기대와 긴장으로 기다리다 실망스런 결과를 맞았다. 이미  여러 번의 탈락을 겪어왔지만 그게 거듭된다고 해서 아픔이 무뎌지지 않더라. 사실 나는 세상에 원망스러운 마음이 든다. 아들은 매번 열심히 공부해 왔고, 더 중요한 건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정신줄 붙들고 다시 일어나곤 했다는 것. 그런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이라니... 그런데 사실은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잘 몰라서 더 이 세상이 섭섭하다.


그래도 그날은 슬퍼하기보다 자기가 얼마큼 단단해졌는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다음엔 무엇을 더 해야 할지에 대해 말한다. 다음 시험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들은 이번 시험 본 이야기를 자세히 한다. 어떤 과목이 어땠고, 같이 공부한 누구는 어땠고,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고, 합격권에 경계에 서 있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어떻게 불안한 마음들을 나누었고....

 

그런데 그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사마저 완벽하게 들린다. 나는 아들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는다.  그 이야기들이 다 재미있다. 재미. 그래, 누군가의 말은 재미가 있어야 들린다. 집중할 수 있는 어떤 요소, 절박하든, 흥미롭든 유용하든 진정성이 느껴져서이든, 그런 게 있어야 온몸으로 들을 수 있다. 아들이 이야기가 내게 왜 재미있게 들릴까?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사무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최고의 경청, 사랑하면 재미있다

연애할 때 사람들은 최고도의 경청의 경지를 맛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마저 다 들리고 다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들....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음소들마저, 눈빛과 머리카락에서 내뿥어지는 향기와 몸짓과 그 모든 아우라가 다 내 세포 구멍으로 빨아들여지는 지독한 경청의 순간...


그리고 아기...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부모는, 특히 엄마는 아이가 하는 말들, 옹알이, 말 비슷한 말, 호흡, 울음, 웃음, 표정 그 모두를 온몸으로 듣는다. 그때도 부모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아이의 말을 '듣는다'.


나는 그날 아들, 딸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 내가 온몸으로 자식들의 말을 듣고 있구나, 느꼈다. 자식은 내가 간절히 바라고 내 피와 살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기에 책임감이 깊어서도 그렇겠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인 사랑을 느끼게 한다. 저들이 기뻤던 것, 자랑스러웠던 것, 힘들었던 것, 좌절하는 것에 내 온 세포가 감응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저녁 내내 실패한 수험, 다가올 시험, 미래, 걱정, 위로, 위안을 가지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일요일부터 다시 공부와 운동을 시작할 결심과 계획을 나누며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자고 일어나 공허감을 느낄지라도

자고 일어난 새벽에 새삼 아들이 시험에 떨어졌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철렁할 것이다. 아들은 그걸 '푹 자고 일어나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공허감'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며칠 동안은 실패를 깨달을 때마다 화가 나고 슬프고 허탈하고 속상할 것이다. 날이 갈수록 조금씩 덜해지다가 다시,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독서실로 가는 일상, 밤에 돌아온 아이들이 먹을 무언가를 만드는 일상으로 돌아가 다음 시험을 기약하겠지. 


일이 술술 풀리는 남의 자식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착하고 성실한 내 아이들이 안쓰럽고 남의 집이 부럽고 그렇다. 내가 나도 모르게 잘못한 일은 없는지 자꾸 헤아려 보면서 괜히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우울한 마음으로 쇼핑은 무슨, 스페인어 공부는 무슨, 나들이는 무슨...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주문처럼 'life if goin' on'  중얼거려 본다. 

나의 처지는 답답하고, 나보다 당사자인 아들의 마음은 더욱 지옥같이 힘들겠지만 수많은 삶의 고난에 비하면 이것을 삶의 끝, 절망인 양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돼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 사람을 열심히 살아가는 일 말고는 고통스러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없다. 


La vida continua

스페인어 문제집을 풀다 보면 '잘 듣고 (문장을) 완성해라 escucha y completa' 이런  듣기 문제가 많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조금 바꿔 보았다.

escucha amante y completa tu vida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네 삶을 완성하라.

왜냐하면 La vida continua, 삶은 계속되기에.    


* 스페인어 잘 아시는 분들, 제 글에서 틀린 스페인어 문장을 발견하시면 알려주세요. 맨땅에 헤딩하며 공부하는 중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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