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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Apr 28. 2024

꿈속에서 유학을 갔다

우울할 땐 스페인어 공부 7

  

사주에 수(水)가 많은 딸냄은 자주 자기가 우울하다고 외친다. 사춘기 때 딸이 하도 “우울해”를 입에 달고 다녀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었다. ‘상냥한 먹보인 주제에 감히 우울을 참칭하다니! 우울은 말야, 응? 나처럼 문학을 공부하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다? 친구 많고 잘 웃고 수다 떠는 거 좋아하는 네가 우울이라니!’ 하지만 중3 때 이유 없이 우울하다고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3주 동안 나와 함께 침대에서 토닥토닥했던 시절을 보내고(담임 선생님은 여학생들에게 굉장히 흔한 일이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날 위로해 주셨다. 선생님, 사랑해요~) 겨우 그 터널을 빠져나온 적이 있긴 하다. 지금은 취업 준비라는 산맥이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겠지. 


많은 꿈, 특히나 쫓기는 꿈에 시달린다는 걸 보면 예민함, 불안감이 그녀를 괴롭히는 게 맞다. 그냥 좀 털털하고 둔감하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호소한다. 우울의 기질을 내게 물려받았나 싶어 미안하다가, 아니! 우울한 게 뭐 어때서! 예술가들은 원래 좀 우울하고 그래~. 그걸 장점으로 여기라고. 어차피 그렇게 태어났으면 마인드콘트롤 해서 잘 극복이 안 되면 그걸 즐기자구! 꿈이 많아? 꿈속에서 또 하나의 세상을 경험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꿈도 즐겨~! 하며 먹히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어 본다.   

  

영감은 불안과 우울, 그리고 꿈에서 온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딸은 우쒸, 또 쫓기는 꿈을 꾸었어, 꿈에 엄마가 죽어서 엉엉 울었어, 꿈을 하도 많이 꾸었더니 삭신이 쑤셔, 이런다. 꿈, 하면 또 내가 ‘한꿈’ 한다. 나는 직업 연관상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데(전공 이런 거 아니다. 나는 문학을 전공했고 그것도 학사가 전부이며, 공부하는 걸 무지 좋아하지만 전부 야매로 한다) 특히 융의 분석심리학과 꿈 해석에 관심이 많다. 나 자신 꿈을 많이 꾸고 새벽에 꿈이 달아나기 전에 그것들을 반추하고 해석해 본다. 힘든 꿈이든 멋진 꿈이든 꿈속 세계를 즐긴다. 


가만, 스페인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으니까...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혹시 꿈속에서 스페인어로 말한 적이 있는가 묻는다면? 물론이다. 꿈에서 산티아고 시골길을 걸으며 마을에 들러 ‘올라 Hola!, 께 딸 ¿Qué tal?’ 은 물론이고 식당에 들어가 “운 빠에야 씬 쌀 이 우나 세르베사 무이 프리아, 포르 파보르~ Una Paella sin sal, y una cerveza muy fría, por favor!” (소금 뺀 빠에야 하나랑 아주 차가운 맥주 하나 주세요)” 이러면서 주문도 하고 그런다.

 

영어 공부 한창일 때 영어꿈을 꾸면 말문이 트이는 거라고 누가 그랬다. 뻥이다. 그냥 미드를 열심히 본 날, 영화가 깊이 마음에 들어온 날 우리는 영어꿈을 꿀 수 있다. 스페인어도 그렇다 <종이의 집>에서 여주 중 한 명의 비극적 서사에 몰입한 날 꿈에서 그들을 만났고, 스페인어 워크북을 열심히 풀다가 졸던 날은 ‘메 구스따 me gusta(난 ~를 좋아해)’와 ‘메 구스딴 me gustan(난 ~들을 좋아해)’을 반복적으로 구사하는 꿈을 내내 꾸기도 했다. 그런다고 말문이 트이진 않는다.     


스페인어로 꿈꾸어 봤나

다시 딸냄 이야기로 돌아가자. 매일 아침 다양하게 불안한 꿈을 시전하던 딸이 어느 날은 매우 개운한 얼굴을 하고 나와 내 등에 머리를 콕 박고 백허그를 하면서 내 똥배를 주무르며 “엄마, 나 꿈에서 유학을 갔는데에~” 꿈얘기를 한다. 


그래, 나도 유학을 가고 싶었더랬다. 유학은커녕 남들 다 공부한 대학원이며 박사과정 따위도 꿈도 못 꾸었다. 순전히 애들 키우느라 바빠서. 직장 동료들은 아기를 키워도 시터를 둔다는 둥 가사 도우미 여사님들이 일주일에 두 번 온다는 둥 했지만 돈도 시간도 도와줄 사람도 없던 나는 그냥 남편과 둘이 힘을 합쳐 어찌저찌 아이들을 키웠다. 공부하는 거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한이 맺힌다, 짧은 가방끈이. 


사실 대학원이나 박사학위는 됐고, 나의 로망 중 하나는 유럽 어느 나라에 유학해 그곳에서 공부하고 오후엔 동네를 산책하다 저녁에 동네 바에서 간단한 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마무리하는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독일 하이델베르그에 들렀을 때, 책을 가슴에 품고 거니는 멋진 독일 여대생들을 보면서 학비도 무료라는데 왜 나는 유럽 대학에 유학 올 생각 한번을 못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 맞다, 나 국문과였지..... 유학을 갈 이유가 없었구나... 무엇보다 난 내 전공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직업을 선택했고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던 우리 과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랑 살게 되었으며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아기들을 낳아 길렀기에 사실 유학을 갈 이유도 없었다. 뭐 그 외에도 아주 사소한 것 몇 가지가 없기도 했다. .....시간이랑 돈? 


나이가 들어 어디선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은 유학생에게도 학비가 공짜이며 영어로 수업을 한다는 글을 읽었다. 혹시 다 늙은 나도 유학이 가능하려나? 그렇게 거기서 공부하다 잘하면 동유럽에 눌러앉아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겐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한국어 교사 자격증’이 있거든.     


하여간 그런 나의 로망은 접었다 해도 내 딸 아이가 유학을 간다면 나도 휴직을 하고 좀 따라가 보는 상상으로 로망의 2차전을 펼쳐본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일그러지는 딸애 얼굴을 보긴 했다. 뭐라, 내가 가서 맘껏 자유를 누려도 부족할 판에 엄니가 날 따라온다고라? 그런 표정.. 너는 유학 가서 전공 공부하고(그때 그녀의 전공은 미술사학이었다. 유학 다녀와서 큐레이터가 되는 딸애의 미래를 응원했더랬지) 나는 오전엔 랭귀지 스쿨 다니면서 영어 공부하고 오후엔 혼자 놀다가 장봐서 너의 저녁을 차려주는 거지(아마 딸냄은, 유학을 간다면 왜 저녁에 거기서 사귄 친구들이랑 파티를 안 하고 엄마랑 저녁을 먹겠냐고 항변하고 싶었겠지만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신중한 것 같으니라구).     

 

큐레이터한국어 교사?

하지만 딸이 걸었으면 했던 큐레이터의 길은 멀고 험난했다. 박봉에 격무에, 일단 일자리 티오도 적단다. 졸업 후에도 박물관 알바나 단기 계약직 같은 걸 경험하면서 그 직업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고개를 설레설레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호화로운 갤러리에 당당하게 전시작품을 여기 놔라 저기 놔라 하는 멋진 큐레이터, 가끔은 외국어(특히 프랑스어!)로 고가의 작품을 쥐락펴락하는 바이어나 작가들과 꿀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은 환상이다. 게다가 큐레이터가 되려면 박사는 기본, 유학은 필수란다. 그 이전에는 박봉을 이겨낸 바닥의 학예사의 삶이 있을 터이다. 따지고 보면 학력 인플레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는 모든 직종에서 그런 과정들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딸애가 큐레이터의 길을 포기한 것은 단지 그녀의 적성과 맞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딸냄이 꿈에서 유학을 갔단다. 우린 둘은 어머! 진짜? 와~ 꺄!를 섞어 가며 꿈 이야기를 나눴다. 뭐 별 건 아니다. 기숙사에 막 도착을 해서 방 배정을 받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만약 유학을 간다면 제일 먼저 할 가슴 설레는 일들을 말했다. 유학은 안 가봤지만 그게 그렇게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닐 게 분명하다. 학비든 생활비든, 공부의 어려움이든, 무엇보다 그렇게 공부하고 돌아온들 미래가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닐 터. 유학과 귀국을 반복하며 낭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고 사실 유학의 과정에서 그 과정 자체를 완결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터. 거기서 겪는 갑질과 차별의 설움은 양념. 

하지만 그런 99의 고난의 시간 말고 오직 달콤한 1의, 시작의 발걸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딸과 나는 설레본다.     

 

유학은 꿈이지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은

나는 이제 뭘 새롭게 공부할 나이가 아니기에 ‘유학’을 떠날 생각은 없다. (얼른 퇴직하고 미래에 생길 손주를 봐줘야 할.. 쿨럭~) 하지만 퇴직 후 다른 나라에 가서 한 2년쯤 한국어를 가르쳐 보고 싶은 생각은 있다. 나는 ‘학교’라는 공간을 참 좋아한다. 대학이면 더 좋지만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 학생으로든 선생으로든 가서 생활하는 상상은 나를 즐겁게 한다. 

사실 학생이나 선생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은, 가르치려든 배우려든 일단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배워서 성취하는 것도 힘들면서 즐겁지만 가르치면서 자기가 가르치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는 존재라는 말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닌 ‘리얼’이다. 정말 재미있게 가르쳐본 적 있는 사람은 자신이 교사이기 이전에 학생과 ‘함께 배우는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한국어가 너무나 배우고 싶은 외국인들에게 ‘ㄱ, ㄴ’부터 가르치는 일은 얼마나 벅차고 재미있을까. 물론 의사소통이 잘 안 되겠지. 나는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혹은 그곳의 언어)를 어설프게 섞어 한국어를 가르치려 애쓸 것이다. 나의 가르치는 스킬은 점점 늘 것이고 재미난 학습도구들을 마련하는 밤을 지새울 것이다. 자다 말고 갑자기 떠오른 재미있는 수업 방식을 적으려고 벌떡 일어나 공책을 펼칠 것이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고 나면 학생들과, 동료 선생들과, 혹은 혼자서 이국의 거리를 걸어 맥주를 마시러 갈 것이다. 응, 그래, 나는 외국에 가서 살아보고 싶은 거구나,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딸아,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너! 너 늦지 않았다? 꿈이 진짜 꿈이 될지도 모르잖니? 아니모(Ani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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