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네가 던져질 차례야. 이젠 내가 널 던져 버릴 거야
한기는 차에 올라탔다. 두 손을 핸들 위에 올리고 턱을 괬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동이 걸리지 않은 채 모든 차창이 다 닫혀 있어서 정체된 공기를 압박하고 있는 듯한 무게감이 숨 막혔다. 희진과 선화가 한기의 자아를 야금야금 할퀴는 기분이었다.
한기는 시동을 걸었다. 핸들은 잡았지만 어디로 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생각나지 않았다. 한기는 두 손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한기는 짜증이 났다. 한기의 두 눈은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고인 눈물이 방울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쩌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데 민기와 작은 엄마가 차 앞에 서서 차 안의 한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휴, 씨발.”
한기의 입에서 쌍시옷의 욕이 뱉어졌다. 차 안에 그 욕을 들어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차 안이라는 그 작은 갇힌 공간 안에서, 화가 나서 욕을 뱉을 때면 희진이 호진의 눈치를 보며 한기를 경멸스럽게 쳐다보곤 했었다. 한기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지 않을 때면 한기는 당연하다는 듯 호진이 듣고 보는 앞에서 희진에게 쌍시옷의 욕을 뱉었었다. 한기는 그랬다.
“아빠가 말하면 그냥 네, 하면 되지 뭔 말이 많아, 이 새끼가.”
호진에게도 그랬다. 쌍시옷의 욕은 하지 않아도 한기의 말을 거스르고 말대답하는 게 거슬렸다. 당연한 거였다. 한기는 아빠다. 집 안의 가장인 아빠의 말에 “왜?”라고 묻거나 토를 다는 건 잘못이었다.
“씨발.”
한기는 민기와 작은 엄마가 계속 쳐다보고 서 있자 또 한 번 욕을 뱉었다. 결국 핸들을 틀고 엑셀을 밞았다.
희진은 대문을 열었다. 대문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잠시 서 있었다. 현관 바닥에는 다행히도 한기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희진은 한기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호진이가 집에서 안 갖고 나온 게 있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했다. 희진이 급하게 캐리어에 속옷이랑 옷이랑 당장 필요한 것들만 잔뜩 담아 가는 바람에 다른 것들은 챙기지 못했다. 꽉 채워서 들고 나갔던 캐리어를 비워서 챙겨왔다.
바로 옆 동네인 친정집에 얼마나 있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변호사 말로는 일 년 넘게 걸린다고 했다. 법적으로 결혼 유지 중이라 쫓아내지도 못한단다. 한기를 보고 싶지 않으면 희진과 호진이 친정으로 가 있거나 따로 주거지를 마련해 분리해야 한단다. 웃기지도 않는 법이다.
희진은 거실을 가로질러 호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호진의 물건들을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가득 채워 넣었다.
캐리어를 중문 앞에 세워 놓고 거실과 부엌을 둘러 봤다. 소파의 덮개는 아래로 흘러내려져 있다. 소파 위의 쿠션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다. 식탁 위에는 먹고 나서 치우지도 않은 흔적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래도 설거지는 했나 보다. 설거지통이 깨끗하다. 가스 렌지 위에는 냄비를 쓰고 치우지도 않고 그대로 올려 놨다. 가스 벨브도 잠겨져 있지 않다. 그럼 그렇지 싶은 희진은 짜증이 올라 왔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안방 안의 패밀리 침대 위에는 이불들이 개켜지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다. 정리하고 치우는걸 도대체가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희진은 한기의 집안사를 알고 나서부터 한기의 정리 안되는 흐트러짐이 싫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구석구석 그 어떤 것도 정리할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 그 습관들 땜에 따라다니며 하나부터 열까지 뒷정리를 해줘야 하는 희진이었다.
호진의 돌잔치 때 한기의 전 여친이 각서 써 준 거 있으니 돈 달라며 남자 한 명과 찾아왔을 때도 희진이가 뒷정리를 해야 했다. 친정 부모님께 걸리지 않으려고 돌잔치 끝나자마자 어른들부터 백화점 카페에 가 있으라고 했었다. 시댁 어른들은 희진이가 빤히 보는 앞에서 한기의 전 여친에게 별일 아니란 듯 한마디 했을 뿐이다.
“한기는 돈 없어도 결혼만 잘 했잖아. 그러니 너도 그만하고 네 살길 찾아라.”
한기만이 아니었다. 한기의 집안 자체가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모르는 사람들만 모인 집단이었다.
호진이가 세 살 때 한기의 전 여친이 받을 돈이 있다며 친정엄마가 사 준 모든 집 안 가구와 전자 제품을 압류했을 때도 희진이 뒷정리를 해야 했다.
모든 게 뒷정리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 짐짝보다도 더한 희생을 갘당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일상 생활 자체도 뭐 하나 정리 정돈이 되는 게 없었다.
호진이는 한기의 차 안이 지저분하다며 타기 싫어했다. 호진이가 한기의 차를 타는 일이 그렇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근 쇼핑몰에 가서 쇼핑할 때도 혼자 가는 사람이었다. 아니지, 이제 보니 혼자 다닌 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 다녔겠지 싶다.
가족이랑 함께 외식하고, 쇼핑하며 소소하게 일상을 보내는 걸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호진과 희진은 항상 한기 없이 다니며 씁쓸한 그 빈자리에 익숙해 갔다. 호진의 유치원 학부모들도, 호진의 초등학교 학부모들도 호진이만 아빠 없이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는 모습에 점점 익숙해 갔다. 일상이 그렇게 한기 없이 당연시돼 갔다.
희진은 점점 익숙해지다 못해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런 희진에게 이번 한기의 상간 사건은 확실한 도화선이 됐다.
희진은 거실에 서서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웨딩 사진을 봤다. 희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빠르게 벽으로 다가가 그 웨딩 사진을 떼어 냈다. 거실을 둘러보다가 신발장으로 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다. 희진은 그 가위로 웨딩 사진을 찍찍 찢어버렸다.
“이제는 네가 던져질 차례야. 이젠 내가 널 던져 버릴 거야.”
희진은 아무도 없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고, 너저분하게 널려만 있는 집안 꼴에 한 마디 던지고는 캐리어를 끌고 대문을 나섰다. 대문이 쾅 닫히고 고요함만 감도는 집안에 더 이상의 머물러지는 숨소리는 없다. 집 안의 물건들과 생활품들은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모르게 그저 그 자리에 던져진 채 침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