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네서점 인문학 강의가 있던 날에 생긴 일이다.
이정모관장, 이명현천문학자, 이건우평론가의 환갑을 맞이한 동갑내기 북토크 행사가 있었다. 자신들이 삶의 궤적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이 도서관이고 서점이라고. 그래서 환갑을 맞이하여 받아 온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작은 서점과 도서관을 다니며 투어콘서트를 한다고 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면서, 수 십 년 동안 한 번의 다툼도 없이, 잘 지냈던 비결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서로 대화하는 식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서로의 만남은 공통적으로 글과 책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책이 출판 된지도 모른 채 유학에서 돌아온 이정모관장은 출판사 사장을 만나기 위해 갔던 자리에서 이명현천문학자를 만난다. 처음 만남이었지만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여운이 남는 만남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모임이 내 상상 속에서는 복사꽃 밑에서 이루어진 도원결의 같아 보였다. 그렇게 자신의 분야에서 일하면서 책을 쓰고 그 책을 이건우 평론가가 평론해주면서 세 사람은 일로 만났기에 딱히 싸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너무나 바쁜 생활 속에서 서로의 글을 읽어주고 평가해주는 이들은 서로에게 도반이었고 후원자였다고.
각자의 에피소드와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행사가 마무리 될 쯤 관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2
내가 이명현천문학자를 알게 된 이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몇 년 전에 죽음에 관해 아주 깊은 생각을 하게 된 일이 생겼다. 가족 중에 죽음 가까이 다가가신 분을 일 년 동안 간호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질문은 죽음이었다. 아니 죽은 후에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은 후에 영혼은 있을지, 남겨진 사람들은 어떨지. 윤회가 있다면 그 삶은 또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법구경’과 ‘숫타니파타’를 정독했다. 하지만 짧은 나의 지식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 죽은 직후에 나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티벳사자의 서’를 읽었다. 대학시절 철학과 수업과제로 제출한 이후 이십년이 훌쩍 지나 다시 책을 들었다. 나이가 두 배로 많아졌지만 그때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내 머릿속이 온통 카오스였는데 단정한 단어인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이 책의 제목을 들어봤지만 완독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벽돌 책이다. 학교졸업이후로 과학 관련 책은 어린이용 동화책 외에는 거의 접해본 적이 없었기에 코스모스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몇 페이지 넘기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때 깨달은 것이 스승 없이 혼자 읽겠다는 오만한 생각이 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을 찾기 위해 핸드폰을 열었다. 유투브에는 수많은 스승들이 있다. 그중 한명을 잘 찾아서 스승으로 모시면 되는 것이다. 물론 쌍방향 학습은 아니지만 어차피 주입식 교육세대라 길만 잘 찾아 주는 스승이라면 괜찮았다. 갈다책방에서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한 챕터씩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책을 읽고 방송을 보고 다시 책을 읽고 그렇게 완독을 했다. 그러고 나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를 읽고 ‘에필로그’, ‘에덴의 용’을 읽었다. 그때 나의 스승이 이명현천문학자이다. 물론 나에게 코스모스에 대해 물어본다면 참 난감하다. 그때는 이해했지만 지금은 휘발성으로 날아가 버린 지식이다. 하지만 이때 내가 깨달은 점은 삶의 명료함과 간결함이다. 무슨 개소리냐고 하겠지만 돈오점수처럼 나는 죽음을 명료하게 깨달았다. 나는 별에서 왔고 별의 먼지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3
내가 몇 달 동안 유투브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그분이 동네 서점에서 콘서트를 한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승을 알현한다는 생각에 그분의 책을 들고 가서 사인을 받아야하는데 난 ‘코스모스’책을 들고 가서 사인을 받았다.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님을 나중에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 똥멍충이다. 마지막 관객들의 질문에 내 가슴이 막 뛰었다. 내가 선생님 덕분에 칼세이건에 입문했고 죽음이라는 나의 화두에 실마리를 제공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질문이 이상하게 나왔다. 준비하지 않고 그냥 마음만 앞섰나보다. 질문이 시원찮으니 대답 역시 두리뭉실한 답변이 돌아왔다.
#4
내 마음에 대한 절치부심은 아니었다.
과학책을 읽고 토론할 기회들이 생기고 덕분에 인문학과 철학까지 읽게 되었다. 혼자서 책을 읽었을 때보다 독서모임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짜 인문학 콘서트에서 이명현천문학자가 초대되었다.
장대익교수와 콜라보로 쓴 책으로 북콘서트를 열었다. 나는 이번에도 이 책이 신간인지도 모르고 그냥 갔다. 난 참 똥멍충이다. 장대익교수와 본인이 과학을 접하면서 겪었던 삶의 덧칠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번에는 콘서트를 들으면서 꼼꼼히 메모하고 궁금한 것을 적었다. 무지에서 온 자신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질문하지 못할 것 같아서. 정말 궁금했던 점을 질문하자 좋은 질문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5
나의 글쓰기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질문을 잘하고 싶었다. 원하는 대답을 듣기위해서는 질문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류의 기술이 무한히 발전하여 이젠 인공지능 쳇GPT에게 물어보면 뭐든 다 대답해 준다. 하지만 빅데이터를 갖고 있는 쳇GPT도 어떻게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진다.
죽음이 무엇인가라는 막연한 질문에서 구체적으로 질문하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질문이 바뀌니 배워야할 것도 알아야할 것도 많아졌다. 전에는 관심 없던 양자역학도 궁금해졌고 빅뱅도 궁금해졌다. 죽음은 그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줄 알았다. 이젠 질문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물으니 죽음은 내 생활 가까이에 있고 나는 매일 한 발자국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막연한 두려움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왜’에서 ‘어떻게’로 진화되어진 내 질문의 방법은 글쓰기로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내가 뭔가를 알았다는 것은 착각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