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반해 엄마 쪽은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었다. 공부에 뜻이 없어 농사만 짓던 외할아버지는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 아들이 인물이 좀 잘났는가보다. 엄마 말로는 영화배우 뺨 칠정도로 인물이 좋았다고 한다. 인물값을 하는지 나의 외삼촌은 조강지처를 두고 작은 마누라를 얻어 따로 나가 살았다. 한동네에 본처와 첩이 같이 사는데 사이가 좋을 수 있겠는가. 공무원 생활하면서 그럭저럭 두 집을 먹여 살리고 있었는데, 시절이 확 바뀌더니 첩을 들인 사람은 모두 공직에서 면직을 시켜버렸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버린 외삼촌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다가 그만 객사해버렸다. 외할아버지는 홧병이 나서 술만 드시다가 그만 굴뚝에서 떨어져 며칠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나이 마흔 넘어 얻은 막내인 우리 엄마랑 외할머니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엄마가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가다가 아빠를 만나 결혼하게 되고 외할머니는 혼자 남게 되었다. 며느리가 둘씩이나 있었지만, 본처는 첩을 들일 때 말리지 않았던 시어머니가 너무 괘씸해서 본인 집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작은 부인은 갑자기 객사해버린 남편으로 인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어 한밤중에 짐을 싸서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결국 외할머니는 그 누구의 돌봄도 없이 혼자 사시게 되었다. 그러다 눈병이 심하게 났는데 치료시기를 놓쳐버려 실명 위기에 놓이자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그 때 우리 집도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팔남매 맏이인 아빠는 줄줄이 동생들 결혼시키느냐 정작 당신은 번듯한 집 한 칸도 없이 남의 집 삯월세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외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몇 년이 같이 지냈다. 엄마는 그때 일을 여러 버전으로 엄청나게 많이 이야기했다. 외삼촌 본처 자식들이 잘 되지 못한 것은 외할머니를 구박해서 저렇게 사는 거라고. 이모들도 부잣집에 시집을 갔는데도 외할머니는 돌보지 않아서 자식들이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고. 그러면서 우리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언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그걸 요즘에 심리학 용어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나도 결혼을 했다. 나의 결혼은 엄마의 계획에서 한참 빗겨나가 버렸다. 오빠의 결혼은 엄마의 계획으로 정말 참하고 돈 잘 버는 전문직 며느리에 집안도 훌륭했다. 그래서 욕심이 점점 생겼는지 나의 결혼도 그렇게 만들어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데 내가 그 계획을 틀어버렸다. ‘장모님, 장모님’ 하면서 이쁜 말 하고 돈도 잘 벌고 집안도 번 듯한 곳에 나를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내가 그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복을 차버렸다고 갖가지 욕을 하면서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악담까지 마구 퍼부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몇 번은 실신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쯤 되면 나도 그만 포기할 텐데 이상하게 포기란 단어는 배추 헤아릴 때만 쓴다는 오기가 생겨 진짜 내 복을 찾아 내가 원하는 결혼을 했다. 그럴려고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내가 결혼할 시점쯤부터 친정집에 우환이 생기더니, 내가 결혼하고 그 집에서 빠져나가자 완전히 살림이 기울어져버렸다.
그렇게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결혼을 시켰으니 살림살이 제대로 갖춰서 보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진짜 내가 내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복으로 살림을 키워나갔다. 진짜 아끼고 아껴 집도 사고 시댁살림도 늘려드렸다. 그렇게 내 복을 키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