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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쓰다 Dec 09. 2023

드라마와 유튜브 이후, 지금이 꽃자리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드라마 엄청 좋아하는 여자다. TV에서 방영한 만화영화를 시작으로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TV를 사랑했으며, 학창 시절엔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볼거리가 없었기에 TV, 특히나 드라마는 공부하는 중간중간 나에게 힐링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드라마를 한번 꼽아볼까나. '수사반장'(이 드라마 속 젊었던 최불암 배우가 생각나는 난 도대체 언제 적 사람인건지), '전원일기', '배반의 장미', '한 지붕 세 가족', '사랑이 꽃 피는 나무', '사랑과 야망',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전설의 고향',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느낌', '파일럿', '질투', '내일은 사랑', '마지막 승부', '카이스트', '두려움 없는 사랑', '내가 사는 이유', '한명회', '엄마의 바다', '용의 눈물', '사랑이 뭐길래', '초대', '꼭지', '학교', '단팥빵', '모래시계', '푸른 안개', '다모', '제5공화국', '가을동화', '겨울연가', '여름향기', '목욕탕집 사람들', '올인', '엄마가 뿔났다', '풀하우스', '거침없는 사랑', '내가 사는 이유', '불새', '인어아가씨',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세븐', '무사 백동수', '시티헌터' 등(내 드라마 인생은 출산 전과 후로 나뉜다)이 있다. 사실 여기까지 떠올리기에도 숨차지만 너무 본 지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나는 것도 많고 기억은 나지만 제목이 생각 안 나는 것도 많다. 나열한 드라마 제목들은 분명 내가 봤던 드라마 중 새발의 피에 해당하지만 더 기억해 내려면 냉장고 문을 열고도 뭘 꺼내려했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요즘이기에 이 정도에서 드라마 소환을 끝내려 한다. 주말드라마.,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일일드라마, 역사드라마, 기획특집드라마와 함께 방학이면 아침드라마까지 섭렵했다. 지금처럼 드라마에 연령제한 표시가 없었기에 부모의 통제가 없는 한 드라마는 부모와 함께 시청하는 안방극장이었다. 어렸을 때는 가족들이 일터로, 학교로 가고 나면 엄마 혼자 TV를 독차지하고 볼 수 있어서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다. 심지어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집에서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보는 것이 소원인 적도 있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이랬던 내가 지금은 TV와 절연을 했다. 시작은 출산과 육아로 텔레비전 보기를 돌 같이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독박육아로 TV는 점점 집 안의 병풍이 되어 갔다. 그러다 아이가 대여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그즈음 뒤늦게 접한 '미생', '응답하라, 1988', '시그널'을 시작으로 '태양의 후예'와 '도깨비', '힘쎈 여자 도봉순'을 챙겨 봤다. 그나마 이것도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허락된 드라마 시청이었다. 그 후 결혼 때 산 TV가 고장이 나자 교육을 핑계로 과감히 버리고 강제로 연을 끊었다. TV와는 연을 끊었지만 우리에게는 인터넷이란 훌륭한 친구가 있었기에 '비밀의 숲', '빈센조', '우영우', '재벌집 막내아들', '천 원짜리 변호사'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고 관심 있는 드라마는 당연 열심히 보았지만 예전만큼의 적극성과 기대치는 없었다. 게다가 최근 본 드라마들은 내가 보고 싶어 봤다기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의 추천으로 같이 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이제 아이가 많이 컸으니 맘만 먹으면 하루에 드라마 두 세편쯤은 인터넷으로 너끈히 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도 관심 가는 드라마도 없다. 교육방송과 방송 3사가 전부였던 옛 시절을 거쳐 케이블 TV로 채널은 다양해졌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인터넷망을 통해 제공되는 미디어 서비스인 OTT의 증가로 볼거리는 더 풍성해져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환경임에도 드라마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아이가 아주 어려서 육아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에게는 여전히 하루가 짧았고 여력도 없었다. 전업주부로서 집안일을 끝내고 수고한 나 자신에게 약간의 기름칠을 하기 위해 책 한 장이라도 들춰보려면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 호흡 긴 드라마는 또 다른 일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봐야 하고 성격상 몰입해서 보는 드라마에 이제는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간신히 남은 내 에너지를 헌납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동안 책을 많이 읽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 삶도 버거운데 일부러 드라마 속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찾아가서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싫었던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수고한 나에게 보상으로 OTT를 통한 드라마나 영화를 선물할 만도 한데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올해 화제작이라 하는 남들 밤새서 다 봤다는 '더 글로리'를 아직까지 보지 않은 것만 봐도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바닥났구나를 알 수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훌륭하고 멋진 배우들과 생각할 거리가 있다 해도 굳이 봐야 할 이유도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물론 드라마 보는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마는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될 만큼의 확고한 드라마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제 나에게 드라마는 그저 입 심심할 때 가끔 꺼내 먹는 초콜릿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끔 먹는 초콜릿처럼 간혹 꽂힌 드라마가 있으면 푹 빠지기도 하지만 옛날처럼의 감정과 감성이 생기지는 않았다.


식성이 변하는 것처럼 드라마 취향도 변했다. 가슴이 말랑말랑해지고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며 보던 멜로드라마에서 장르물 위주나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유쾌한 드라마를 더 찾아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생기고 예쁜 남녀 주인공의 아름다운 사랑 앞에서 엄마 모드가 되어 '사랑은 개뿔, 한 번 살아봐라, 결혼은 현실이다' 등의 몰입감 깨는 팩트를 여지없이 날리며 더 이상의 상상력을 가동하지 못했다. 육아로 참을성이 길러졌는 줄 알았는데 고구마 먹이고 얘기가 산으로 밭으로 가는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는 끝까지 보지 않고 과감히 시청을 중단해 버렸다. 비현실적인 얘기는 내 삶과 너무 동떨어져서 보기 싫었다. 너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얘기는 연신 맞장구치며 보다가도 한숨과 분노에 짜증이 났다. 어느 때는 감성이 먼저가 아니라 평론가인양 드라마 내, 외적인 부분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며 세발자국 뒤로 빠져 보느라 집중하지 못했다. 이제는 어렸을 때처럼 온전히 드라마에 빠져들어 볼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일까. 아니면 꿈을 잃어버린 것일까.




드라마에서 눈을 떼니 또 다른 세계가 보였다.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나이, 감성도 이성도 아닌 현실성만 남은 감정, 애초에 잊힌 꿈으로 삶이 공허했던 나의 헛헛함을 채워 줄 다음 타자는 유튜브였다. 본격적인 시작은 4년 전부터 초등교육 관련 내용들을 하나, 둘 챙겨보면서였다. 힘들고 지칠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먹방을 보기도 했고, 요리나 집안 살림 관련 내용을 보기도 했고, 건강, 자기 계발 관련 내용들도 보았다. 게다가 관심 없던 지난 드라마,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도 요약 정리해 주고 예능프로그램도 재미있는 부분을 내 입맛에 맞게 골라 볼 수 있었다. 거기엔 나와 내 가족만 없을 뿐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알려진 배우들이나 각계각층에 있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삶이 담겨 있었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기 위한 콘텐츠로 짜증이 날 때도 있었지만 바쁘고 힘든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내용들은 차고 넘쳤다. 심지어 유튜브란 놈, 똑똑한 건지 영악한 건지 주로 내가 맛보는 영상들을 기억하고는 먹던 것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른 것도 한번 먹어 보라고 매일 밥상을 차려주는 알고리즘 집사까지 나한테 붙여 주었다. 집사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많이 드나들었다. 오래 앉아서 봐야 하는 드라마보다는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짬짬이 짧은 시간 안에 볼 수 있는 유튜브는 반갑고도 고마운 존재였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유튜브 또한 재미있고 알게 되는 것도 많았지만 반면에 내 시간과 시력을 포함한 체력을 많이 투자해야 했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보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 있기도 했고, 오전 중으로 빠르게 해치우려 했던 집안일을 뒤로하고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유튜브 속에는 우리의 뻔한 일상도 있었지만  살림 잘하는 주부, 아이 잘 키우는 엄마, 워킹맘으로 성공한 여인들, 한 분야에서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부럽기도 했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좋은 점들을 본받고자 보는 동안 뇌새김질하며 도전 의지를 불태웠지만 창을 닫음과 동시에 여전한 나로 돌아와 버렸고 작심일일은 부지기수였다. 아이와 있을 때에는 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책 보는 시간을 위해 드라마는 보지 않겠다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책이 너무 멀게 느껴질 만큼 유튜브의 유혹은 컸다.(성인도 이런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말해 뭐 할까.) 책과 멀어지니 글자가 빼곡한 책을 보면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 지식, 정보, 건강 관련해서는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영상을 보지 않으면 뭔가 많은 것을 놓쳐 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도 났다. 어떤 날은 유튜버들의 공구에 합당한 이유를 대며 지갑을 열기도 했다. 마치 주인님의 부름에 따라가는 노예가 된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드라마는 끝이 있었지만 유튜브는 끝이 없었다. 내 기준에서는 드라마보다 더 나쁜 놈이었다. 결국 올해부터 유튜브란 놈을 멀리하기로 했다. 더 이상 내 시간과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유튜브란 놈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손절하기에는 쓸모가 꽤 있다는 내 나름의 판단하에 당장 쉽지는 않겠지만 유튜브를 내 손바닥 위에서 놀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더 이상 드라마가 기다려지지 않는, 유튜브를 좀 멀리하기로 마음먹은 전업주부는 몸을 더 많이 놀리기 시작했다. 원래 하던 일이고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이므로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생기겠지 하는 안일하고 막연한 생각을 하며 다른 주부들도 다하는 그 일을 더 열심히 했다. 가끔 아이에게 엄마로서 당당하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위해, 남편이 술과 함께 늦은 귀가를 할 때 거만하게 팔짱기고 아내로서 한 소리 하기 위해 주부로서의 역할을 더 충실히 이행했다. 코로나 시대엔 마치 집안의 CEO인양 더 큰 소리를 내며 일했다. 바쁘게 일할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의 멍함과는 다른 멍한 시간이었다. 그제사 드라마만큼 좋아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멍함은 나에게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집안일을 하면서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를 수백, 수천번 물어봤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뜬구름 잡는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예전에도 계속 물었던 이 질문들. 가족들은 물론이고 나도 모르겠는, 혹시 밖에서는 알 수 있으려나 해서 사람들을 만나도 정확히 몰랐던 질문의 답, 드라마를 통해 웃고 울어도 닿을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던 답, 유튜브를 보며 지나간 것을 추억하고 새로운 것에 놀라며 현재를 즐겼지만 여전히 미지의 세계인 내 안의 나.


그러던 중 시간이 약인지, 몸을 움직이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그 말이 사실인지, 멍 때리는 시간이 있어야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육아서적에 쓰인 말이 진리인지 오리무중이던 질문에 대한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와 유튜브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내 안의 나를 밖으로 표출하기로 했다. 몸이 아닌 글쓰기를 통해서.

이미지 출처: pixabay


요즘 그 답이 맞는지 검산 중이다. 기본, 응용, 심화 부분을 드라마나 유튜브가 아닌 독서로 채우며 답이 맞는지 서술형으로 검산해 가는 과정이 무척 험난하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검산을 해 봤더니 내가 찾던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설령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해도 지금 이 순간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이 순간은, 잘 지내고 있던 때에도 광고 속 문구처럼 항상 2%가 부족해 다른 것을 꿈꿨던 내가,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돌고 돌았던 시간들의 합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찾아낸 질문의 답이다. '10년만, 아니 5년만 젊었어도'라는 생각을 했었던 이전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이 고맙고, 내 나이가 너무나 맘에 든다. 드라마와 유튜브도 좋지만 비로소 나를 들여다보기로 한 지금이 바로 내 꽃자리니까.




***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의 글쓰기> 속 '오늘의 글쓰기 과제'를 연재합니다.



<상단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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