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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Dec 19. 2023

해지는 풍경을 마흔네 번이나 봤던 날

보홀을 아시나요?


"어느 날에는 해지는 모습을 마흔네 번이나 구경했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알게 될 거예요. 대개 사람들은 몹시 쓸쓸할 때 해지는 풍경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그럼 그 모습을 마흔네 번이나 바라보던 그때의 넌 그렇게도 쓸쓸했던 거야?"

어린 왕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 어린 왕자 > -생텍쥐페리-



그날은 아마도 보홀에 온 지 7일 정도 되던 날이었을 것이다. 리조트 앞 비치에 앉아 1+1 칵테일을 마시며 이든이가 모래놀이 하는 것을 지켜보며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니 보랏빛이었나. 주황, 분홍, 보라 여러 가지 색깔이 모두 섞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부터가 바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동남아의 공기 속에 따뜻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면서 머리카락을 날렸다. 리조트 풀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적당하게 귀를 간지럽힌다. 문득, 매일 이런 해지는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이곳에 와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아까부터 함께 하늘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매일매일 이런 풍경을 보면 어떨까? 나는 이 정도라면 여기에 와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아. "


"정말 너무 예쁘네.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평소 '너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 남편이 '너무'라고 했다.


"이든이도 여기에서 살면 좋을 거야. 물 좋아하고 모래 좋아하는 이든이한테 여기는 천국이지, 뭐. 매일 물놀이, 모래놀이 하고 노는 거지. 더 크기 전에 와야 해."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보홀의 석양에 반해 우리는 꿈같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잠시동안 음악, 바람, 모든 풍경들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고 우리는 지금보다 6살 어렸고, 이든이는 4살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이였다. 이든이는 모래를 파고 모래를 쌓고 소라게를 잡으며 놀고 있었고 우리는 풍경과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그 해지는 풍경에 반해 6년 만에 다시 보홀을 찾았다. 물론 우리는 보홀에서 살지 못했고 한국의 아파트에서매달 대출금 이자를 내며 한 달, 두 달 그리고 1년, 2년을 보내며 살았다. 그동안 힘들었던 일도 있었고 물론 일상의 소소한 행복한 일들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4살이었던 이든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30대였던 우리의 나이는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내내 6년 전 그날의 석양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혼자서도 이따금 떠올랐고, 여보와 함께 있을 때에도 가끔, 문득 누가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날을 소환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리운 한 페이지였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6년 전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다.



"꺄아... 이든이 좀 봐. 정말 애기다. 왜 이렇게 조그만 해? 이 볼살 좀 봐. 힝, 너무 귀엽다. "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많이 큰 거야?"

"자기야, 이거 기억나? 우리 조식 먹고 여기서 같이 줌바 수업 들었었잖아. 선생님이 이든이도 같이 들어오라 그래가지고 끝나고 다 같이 사진도 찍고."

"기억나지~ 나 그때 지인짜 힘들었어. 줌바는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지. “


사진을 보니 그때가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6년 전의 사진엔 앳된 우리가 있었고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알로나비치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아무 곳이나 들어간다. 바다가 잘 보이는 모래 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산미구엘 두 병과 망고셰이크 한 잔을 시킨다. 곁들일 건 피자나 감자튀김 혹은 꼬치 어떤 음식이라도 좋다. 해가 뜨거운 낮은 뜨거운 해를 잠시 피하며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고, 조금 선선해지는 저녁이면 반짝반짝 불빛과 함께 라이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아니, 그냥 모든 게 다 좋았다. 눈을 뜨면 수영을 하고, 조식을 먹었다. 리조트 산책을 하거나 바다에 나갔다가 또 수영을 하고 산미구엘과 망고셰이크를 마셨다. 점심을 먹고 마사지를 받고 이든이와 남편이 수영을 하는 동안 선배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낮잠을 자기도 했다. 완벽했다. 우리에게 보홀은 그런 곳이었다.



저녁엔 돌아다니며 상점들과 야시장을 구경한다. 소소한 것들을 사고, 난생처음 헤나도 해보았다. 한국에서 어쩌다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마사지를 여기에선 마음껏 받았다. 텔레비전 없이 휴대폰 없이 풍경을 감상한다.(물론 사진을 찍는다고 휴대폰을 들긴 했다. 인스타업로드도 조금 했다. 반성한다.) 아름다운 보홀의 석양을 마음껏 찍었다. 아무래도 사진에는 다 담기지 않는다. 만족스럽지가 않다. 몇 장 더 찍어보지만 실물보다 나은 사진이라는 건 풍경에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6년 전 그때, 보홀 석양의 아름다움에 대해 친구에게 찬양하며 거기에서 살고 싶을 정도였다고 이야기했다. 호주에 살고 있는 친구가 말했다.


"그래, 보홀 석양 아름답지. 그런데 거기서 살면 또 다를 거야. 호주의 자연이 너무 아름답지만 생활이 되면 항상 그렇지만은 않거든. "


친구는 웃으며 말했지만 가슴이 조금 찌릿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던 때가있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겠지, 그런 날도 있겠지. 멀리 있어서 작은 일, 큰 일 서로 모두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결국엔 보고 싶다로 이어진다. 작년, 호주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감탄했다. 바로 옆에서 같이 보고, 함께 아름답다 느낄 수 있음에 이번엔  마음이 찡했다.



6년 만에 보홀로 떠난다. 보홀의 해지는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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