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학원 선생님의 선언
"선생님, 안녕하세요. 결제날이라 왔어요."
"네, 중기 어머님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카드가 결제되었다는 알림과 동시에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저.. 선생님, 중기가 영어녹음하는 게 힘들어 보여서요... 제가 보기에 영어지문이 중기 실력보다 레벨도 높아 보이고 양도 많다 보니 분량을 좀 줄여주셨으면 좋겠어요. 꾸준히 하기엔 아이가 양이 많아 되려 숙제를 못해가는 일이 잦아지네요."
"흠~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중기는 충분히 할 수 있고요. 꾸준히 하면 확실히 실력은 늡니다. 제가 가는 방향에 이러쿵저러쿵 얘기 안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중기랑 같이 하는 친구도 아무 말 없이 녹음 잘 해와요. 중기는 머리가 엄청 좋은 녀석인데 자꾸 안 하려고 꾀를 부려요. 어머님이 자꾸 끌려가면 안 돼요."
"그래도 선생님.. 꾸준히 해야 실력이 오르는데 아이가 힘들어해서 꾸준히가 안되는데.. 난이도를 조절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어머님, 중기는 녹음숙제 말고도 다른 숙제도 자주 빼먹고 와요. 제 교육방향보단 어머님이 아이 숙제를 관리해 주시는 게 더 시급해 보이는데요. 일단 숙제부터 관리를 해주시고 나서 얘기해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숙제를 잘 빼먹고 안 할 거면 학원을 그만 두세요. 저는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는데 중기가 숙제를 안 해오니 제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숙제를 안 하면 실력도 오르지 않습니다. 일단 숙제부터 잘해오고 나서 저한테 건의해주세요."
"네... 선생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번 한 달 동안은 중기 숙제를 관리하면서 학원을 다닐지 말지 여부는 생각해 보겠습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존심도 뭉개졌다. 아들 녀석 하나 키우면서 다양한 이벤트를 겪고 살았지만 이런 수모까지 겪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학원 선생님 입에서 끊으라는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고, 학원을 끊고 말고는 학부모인 내 결정에서만 당연히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호랑이의 크고 날카로운 발톱이 확 긁고 지나간 자리처럼 마음이 너덜너덜 해졌다.
솔직히 아들의 숙제관리를 꼼꼼하게 하지 않는 편이다. 일부러 챙기지 않는 것도 있고, 일일이 확인하는 건 저학년일 때나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일부러 챙기지 않았던 이유는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주기 위함이었다. 숙제나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고 학교나 학원을 가면 선생님께 혼날 것이다. 혼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챙겨서 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퇴근 후 아직 손이 많이 가는 둘째의 케어로 인해 큰 아이의 학원 숙제까지는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중기를 믿었고, 구두로만 숙제를 체크했던 내 잘못도 없지 않아 있다. 숙제를 했다는 아이의 말만 믿어줬던 지난날의 내 과오로 학원을 끊으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학원 문을 닫고 나오면서, 창피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가까스로 다잡고 집이라는 쥐구멍으로 향했다. 경보하듯 발걸음은 빠르게,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집에 들어왔다. 중기 이 녀석을 어떻게 혼을 내야 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눈앞에 중기가 있었다면 김연경 선수의 손을 빌려 등짝 스매싱을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셔도 화가 난 마음을 진정시키긴 어려웠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캡슐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마시면서 순간 멍하니 한 곳만 응시했던 것 같다. 누구의 잘못인 걸까. 중기의 잘못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고학년이라는 이유로 그저 아이의 학습에 소홀히 관리했던 내 탓도 자명했다. 중기가 준비물을 빼먹고 자기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오면 남편은 애 좀 신경 쓰라고 쓴소리를 해댔다. 질세라 언제까지 챙겨줘야 하는 거냐며 자꾸 챙겨주니 부모 믿고 챙길 생각을 하지 않냐며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모든 잘못은 나로부터 찾으라고 하지 않던가. 12살이 해낼 수 있는 능력치와 내가 바라보는 능력치가 서로 달랐다. 둘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중기에게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아직도 미숙한 아이를 다 큰 아이 대하듯 키웠다. 지금 둘째가 그때의 중기 나이가 되고 보니 중기도 이렇게 어렸을 땐데 아이로 보지 못하고 너무 큰 잣대를 들이밀어 중기에게 부담을 짊어지게 했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고기를 낚아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말이 독이 되었다. 아마도 중기에게 낚싯대를 보여주지 않은 채 낚싯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입으로 설명만 하고 네가 만들어 고기를 낚아보라며 아이를 방임해 온 건 아니었을지 되돌아보게 됐다. 여러 번 도전해 보고 실패를 하며 성장하길 바라던 교육철학은 아이의 능력보다 좀 더 엄격하게 적용되었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리고 부모의 세심한 관심이 필요했던 아이를 일찍 손에 놓아버린 셈이었다.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던 적이 많았을까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중기가 하교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밀려왔던 숙제들과 성실하게 숙제를 이행하지 못한 행동들에 대해서 대화를 했다. 부모가 안일하게 숙제 검사를 하는 점을 이용해 꾀를 내고 숙제를 안 해 갔던 것에 잘못을 인지했고 한 달 동안 성실히 숙제를 완수해 보기로 했다. 물론 숙제를 잘 챙겨서 할 수 있도록 엄마가 도와주겠다고도 약속했다. 30일 목표를 설정하고 우리 모자는 성실히 이행해 갔다. 체크리스트에 숙제를 적어 하나씩 지워나갔다. 부모가 옆에서 챙겨주면 아이도 묵묵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목도했다.
이제 아이 속도에 맞춰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양분을 보충해 주며 손을 놓을 시기를 기다릴 것이다. 낚싯대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만들어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어떻게 고기를 낚는지도 알려줄 것이다. 부모의 눈높이가 아니라 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이가 자립해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네 스스로 잘 크거라 했던 쿨내 진동한 미숙한 엄마의 육아 방식은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엄마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책 읽는 습관이 형성된다고 하듯,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며 아이는 답습해 인생을 꾸려 나갈 것이다. 스스로 주도하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고 시행착오를 겪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중기도 나중에 아이를 낳고 잘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멋진 아빠가 되기를 바라본다.
중기는 한 달 동안 한 개도 빠트리지 않고 영어숙제를 해갔다. 그동안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낀 선생님께 숙제를 완수하는 중기의 노력을 보시고 치유가 되었기를 바란다며 말씀드리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몇 년 동안 다니면서 익숙해진 환경을 바꿔 새롭게 시작해 보고자 중기와 함께 내린 결정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나도 엄마로서 자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