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죽계 Nov 12. 2023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의 불편한 진실

‘첫딸은 살림밑천’이란 표현에 담긴 불편한 진실



남녀가 혼인을 해서 맨 처음 낳은 아이를 첫애, 첫아기 등으로 부르는데, 첫 아이가 딸인 경우 이 표현을 많이 썼다. 이 관용구, 혹은 속담은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까지 일반적으로 쓰였던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 관용구의 의미는 아들을 선호하던 전통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첫딸을 낳으면 당사자나 집안에서 매우 섭섭해 하였으므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정도다. 이 해석은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구조였으며, 그 결과 사회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했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났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확실한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국어사전 중 국립국어원에서 편한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속담에 대해, “딸은 집안 살림을 맡아 하게 되므로 큰 밑천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라고 하여 살림밑천이란 말이 가지는 중요성을 상당히 살려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현실적이며, 냉엄할 정도로 차디찬 삶의 진실이 녹아 있어서 주의 깊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살림밑천이란 표현은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는 그런 뜻 이상으로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불편한 진실을 감추면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살림밑천이란 표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살림이란 말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형편이나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정이나 집단, 국가 등의 재정 형편을 나타낸다. 살림이 쪼들린다고 하면 가정이나 국가를 꾸려갈 현금이나 재원(財源)이 부족해서 생활이 어려운 상태를 의미하고, 살림이 펴진다고 하면 재정 형편이 좋아져서 한 가정의 생활이나 국가와 조직의 운영이 윤택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밑천은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바탕이 되는 돈이나 물건, 기술, 재주 따위를 이르는 것으로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크게 일어나거나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밑천이란 표현은 현재 상태가 별로 풍족하거나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살림밑천이란 말은 돈이나 자산과 같은 재원 따위가 충분하지 못해서 넉넉하지 못한 상태의 가정 형편에서 앞으로 집안 살림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현금이나 자산이라는 의미를 그 속에 깔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현금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 어떤 것이든지 살 수 있는 최고의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당한 양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리고 자산은 그것을 매매함으로써 현금화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의 교환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살림밑천이란 말은 특히 갓 혼인해서 아직 살림이 펴지 못한 상태에 있는 신혼부부의 가정에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 일반적으로 종자돈이라고도 부르는 이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적금을 들기도 하고, 저축을 하기도 하며, 누군가에게 빌리기도 하는 다양한 행위를 한다.



그만큼 살림밑천으로서의 현금이나 자산은 한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핵심 중의 핵심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림밑천이 될 만한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림이 아직 펴지 못한 젊은 부부의 가정에서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살림밑천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첫딸은 살림밑천이란 표현으로 돌아가 보자.



첫아들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첫딸을 살림밑천이라고 했을까가 이 속담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남아선호사상을 중심으로 했던 전통사회에서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첫아들에게 붙이는 것이 한층 합리적일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첫딸에게만 이러한 표현을 바ᆕ같여서 관용어를 만들어냈다. 왜 그럴까?



여기에는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처절하면서도 현실적인 경제 논리가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다. 즉, 적당한 나이가 되어 첫딸을 결혼시키는 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는 의미보다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부모에게는 살림밑천을 장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매서울 정도로 냉철한 경제 논리가 이 문장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의 현재 상황을 예로 들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불과 오륙십 년 전 까지만 해도 일반 서민의 가정에서 첫딸의 혼인은 많은 경우 돈이나 자산과 깊은 관련을 가진 집안의 행사였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누이들이 그렇게 해서 친정을 일으켰고, 동생들의 학비를 조달할 수 있을 정도의 살림살이를 만드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부모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다. 그렇지만 산목숨을 부지하면서 나머지 구성원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첫딸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부모가 직면한 뼈아픈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을 쓰지 않고는 한 가정의 살림을 일으킬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서민 대중들은 눈물을 머금고 첫딸의 희생을 디딤돌로 하여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 가정의 살림밑천이 되어야 했던 우리의 누이와 혈육을 팔다시피 해서 첫딸을 혼인시켜야 했던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 일이다.



짧고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속담 안에 처절하리만큼 냉엄하면서도 불편한 경제적 진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굳이 짚어보는 이유는 과거에 만들어진 관용구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과거의 그것과는 방식이나 형태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결코 사라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냥 별 생각 없이 스쳐지나가듯이 내뱉는 한 마디의 표현 속에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진실들이 새색시처럼 수줍게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생전(生前), 혹은 생전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