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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계 Mar 29. 2024

'감각의 제국' 리뷰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그린 영화, "감각의 제국"     


감각의 제국은 섹스영화인 것처럼 광고가 되었다. 내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지만, 거리에 붙은 광고 전단에는 그렇게 인식할 수 있도록 홍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감각의 제국은 포르노 영화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섬뜩할 정도의 군국주의 영화이며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 사람들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부터 쓰는 감상평을 한번 읽어보면 그렇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작부집을 운영하는 집의 남자 주인과 작부 한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섹스하다가 나중에는 여자가 남자를 목 졸라 죽이고, 죽은 남자의 성기를 들고 다니다가 잡혔다는 것이 전부다.     


이야기 속에는 갈등도 없고 폭력도 없고, 짜릿한 감동을 주는 대사도 없다. 시종일관 성관계 하는 것만 나온다. 바로 이점이 이 영화가 가진 특징이며 장점이다.     


  남녀의 성관계는 우주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성관계는 서로 상대되는 존재끼리 싸우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투쟁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한 투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변증법적 관계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투쟁이란 무엇인가? 우선 두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란 점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이다. 떨어져서 살고 떨어져서 자고 한다면 어떻게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랑하는 관계는 필수적으로 붙어있어야 하는 관계이다.     


   다음으로 이 두 관계를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관계이다. 투쟁의 관계에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 관계는 서로를 죽이지 않는 관계이다.     


    죽이는 관계로 되면 이미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원수의 관계이다. 이 두 관계 중 하나만 깨어져도 사랑은 깨어지고 영원한 이별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남녀의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를 70년대 일본의 현실과 연결시켜 만든 영화가 바로 감각의 제국인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인 두 남녀는 위에서 말한 변증법적 관계에 있었다. 변증법적 관계라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대립하는 관계, 보존하는 관계, 높이는 관계가 그것이다.     


    대립하는 관계란 마주보고 있는 관계로 남녀가 마주보고 사랑하는 행위를 생각하면 된다. 보존하는 관계란 자신과 대립되는 모순을 없애지 않고 보존시킨다는 것이다.     


   자신과 대립되는 성격을 죽여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잘 보존하면서 늘 대립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남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높인다는 것은 이 두 관계를 발전적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변증법은 正과 反이 있고, 그것이 합쳐져서 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合은 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合은 앞의 정과 반에서 있었던 모순(矛盾)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정과 반으로 다시 쪼개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탄생을 통한 발전과정이다. 이것이 깨어지면 그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고 새로운 세계를 낳을 수 없다.     

    남녀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관계이다. 그런데, 감각의 제국에서는 이러한 남녀의 관계가 깨어지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나이 젊은 여성과 나이가 들은 남성이 만난다는 설정에서 이미 그 씨앗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나이가 든 남성과 나이가 젊은 여성은 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의 앞잡이가 된 신세력이고, 남성은 옛날의 영광과 힘을 추억으로 먹고살면서 옛날에 간직했던 힘을 무기로 자신의 부인 정도를 만족시켜주는 데 안주하고 있는 존재로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오직 남은 것은 성기에 남아있는 힘 하나밖에는 없다. 그러나 부인은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남편이 가진 힘에 의해서 즐거움을 누리지만 먹고살기 위하여 술집을 경영한다. 자본주의의 물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러나 남자는 여기에 적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군국주의의 잔재이기 때문에 힘을 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져서 미국에 항복을 한 일본은 철저한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안보투쟁이었다.     


    그러나 안보투쟁 역시 무참한 진압으로 실패하게 되면서 이제 일본은 고분고분하게 자본주의의 물결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 일본의 경제에 불을 당긴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하여 미국은 일본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었고, 이 대가로 일본은 안락한 경제생활을 누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군대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를 같이 두지 않았다. 어느 하나가 죽어야만 미국은 일본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군국주의의 죽음을 미국은 요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상황을 그린 영화가 바로 감각의 제국이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영화 속의 주인공 남자는 처음에는 아내와 성관계만 갖는 존재였다가 여 주인공은 만나면서 부터는 차츰 차츰 아내와는 성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상태로 되고 만다.     


     그것은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상대여자가 자신의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강요는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한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여자의 손에 의해 언젠가는 자신이 죽을 것이란 사실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의 힘만으로 상대를 만족시켜줄 수 없음을 안 남자는 목을 조르면 성기가 커져서 여성을 만족시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만다. 이제 그는 이로 인한 마지막 죽음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된 후에 여자가 교장 선생을 만나러 간 사이에 남자는 이발소에 다녀오게 된다.     


    이발소에 나와 길을 가는데,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의 옛 군대가 행진을 하는 것이 나오고 남자는 힘없는 몸과 무표정한 얼굴로 그 군대를 바라본다. 옛날에는 자신도 그런 군인이었지만 이제는 추억 속에서도 가물가물한 군대이다.     


     이것을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남자 주인공이 일본의 군국주의 잔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관조자가 되어 버린 남자 주인공, 이제 그는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감각과 힘이 지배하는 군국주의는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처럼 변증법적 관계에 있지만 일본의 현실은 그 모순이 공존함을 거부하게 된다. 전쟁에 진 나라의 처참함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군국주의는 죽음의 길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 이발소에 다녀오는 행위 또한 죽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죽음의 한 의식이다. 그렇다면 교장 선생은 어떤 존재인가? 교장 선생은 남자 주인공의 아내와 같은 존재이다.     


    여주인공이 함께 어디를 가자고 하니까 그러면 큰일이 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만을 지키는 존재가 바로 교장 선생이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남자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교장 선생과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이미 군국주의의 피를 먹고 자라도록 설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남자에게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죽음 의식은 다시 시작된다. 여자의 이러한 행동은 바로 일본의 고민이며 그 시대의 일본이 안고 있는 고민이었다. 일본인이라면 어찌 군국주의 시절의 영광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강요된 힘에 의하여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바로 일본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결국 성행위 뒤에 잠에 빠진 남자를 목 졸라 죽이는 여자! 그리고 죽은 남자의 성기를 칼로 잘라내는 여자! 마지막 남은 힘의 원천을 죽이면서까지 집착해야하는 일본의 슬픔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섹스와 군대는 힘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렇게 연결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군국주의 영화가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슬픔은 생명력이 없으면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없는 성기를 잘라서 그것을 들고 다니면서 행복해하는 슬픔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경찰에 잡힌 여자는 매우 행복한 표정이었다고. 이 말 한마디에 감독은 모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죽어버린 군국주의를 잡고 행복해하는 바보 같은 일본이여 제발 각성하라. 어느 한쪽만으로는 절대로 일본은 일어설 수 없노라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대에 숨바꼭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어린이와 남자가 나오다가 어느 순간에 여자로 바뀌면서 남자는 사라지고 만다. 이 술래잡기는 무대 위에서 하는 것으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린이, 그것도 여자 어린이와 여자만 남고 남자는 없어진다. 일본의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기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여자, 그리고 죽은 남자의 성기를 잘라서 가지고 다니면서 행복해하는 전후의 일본, 바보 같은 자신들의 모습을 이 영화는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와 지향을 섬뜩할 정도로 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하면서 깊은 이념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예술성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이 이 영화에게 많은 상을 안겨다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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