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영화 "감각의 제국2"
감각의 제국 1편이 만들어진지 30년이 넘게 지난 2008년, 젊은 감독에 의해 후속편인 2편이 제작되었다. 사랑하는 남성을 여성이 목을 졸라 죽였다는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감독이 바뀌었고, 사회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1편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관객에게 매우 불친절한 영화인 것으로 보인다.
1편과 마찬가지로 2편도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1936년에 죽임을 당했던 이시다는 70여년이 지난 후에 여성의 누드를 찍는 사진작가로 다시 태어나고, 오오미야 교장의 부인이 되어 있던 1편의 여주인공인 사다와 운명의 재회를 하여 다시 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교장인 오오미야는 두 사람의 육체적인 사랑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재판을 통해 심판하려고 한다. 재판정에 선 사다는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며, 그들의 사랑이 왜 나쁘지 않는가에 대해 검사와 설전을 벌인다. 그러다가 사다는 이시다의 아이를 낳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서사적인 줄거리로만 보아서는 아무런 재미도 찾을 수 없고, 어떤 의미도 찾아내기 어렵다. 그리고 액션도 없고, 폭력도 없으며, 스피드도 없어서 정말로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영화를 잘 보면서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캐릭터의 성격과 21세기의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현재의 일본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보자.
21세기의 일본사회는 엄청나게 복잡하다. 자본주의의적 입장으로 보아서는 세계적인 경제대국이면서 외교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라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고유의 전통을 잘 고수하면서 수준 높은 삶을 누리는 세계 일류국가 중의 하나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 사회 어디에도 진정한 일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복잡한 문명과 문화가 뒤엉켜 있어서 일본의 정체성을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인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혼란 속에 경제적인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바보가 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한 상태의 일본을 표현하기 위해 이 영화에서는 세 가지 기법을 쓰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면서 진행하는 방식이 하나이고, 너무나 현란하여 괴기스러울 정도로 어지럽고 복잡한 색깔을 쓰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마지막 하나는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 방법이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점에서는 20세기에 있었던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군국주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여 별로 기분이 좋은 아니지만 1편과는 달리 2편에서는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어서 약간은 다른 느낌을 준다.
어지럽고 복잡한 색깔은 등장인물의 옷과 배경의 색깔이 모두 괴기스러울 정도로 혼란스럽다는 점에 있다. 여주인공의 옷의 색깔은 전통적인 기모노의 색이고, 오오미야는 검은 색이며, 이시다는 현대인의 옷차림이며, 판사와 검사는 이 둘을 혼합한 색깔을 띠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서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약간은 어색할 정도로 말이 어눌하고 행동도 과장되어 있다. 말과 행동뿐 아니라 얼굴이나 입술의 색깔 등도 모두 연극에서 하는 분장을 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인지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처럼 불편한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현재의 일본이 안고 있는 답답하고 불편한 사회적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일그러지고 깨진 일본인들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기법은 관객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장치들은 모두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혼란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성격에 대한 것이다.
1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남녀 주인공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2편에서 핵심적인 캐릭터는 남녀 주인공과 더불어 사다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오오미야 교장을 포함한 세 사람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서 가지는 세 사람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영화를 감상하는 핵심이 된다.
먼저 오오미야 교장을 보자. 오오미야는 하얀 머리를 하고 검은 옷을 입었으며, 권위의 상징인 지팡이를 들고 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검은 치마를 입은 노파 차림으로 변신하면서 남성의 상징인 성기가 없는 상태로 그려지는 인물이다.
1편에서 오오미야 교장은 미국식 교육 이념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치는 도덕군자이면서 내면적으로는 타락한 존재로 등장했었다. 30년이 지난 뒤 오오미야는 껍데기는 아예 미국인처럼 되어버린 괴물이 되어 있다.
머리가 하얀 것이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지는데, 흰색은 서쪽을 상징하고, 그것은 일본의 현재 상태에서 볼 때 자신들의 태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서방을 대표하는 미국을 의미한다. 오오미야의 이런 머리색은 미국사람처럼 행세하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그는 검은 옷을 한 번도 벗은 적이 없다. 이것의 의미는 미국인처럼 행세하면서 여주인공이 하는 사랑의 본질은 보려 하지 않고 그녀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존재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죽은 일본인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러다가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검은 치마를 입은 추한 늙은이로 변신하는데, 이것은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는 어느 총리처럼 국제적 매춘부가 된 미국지향적 일본인 혹은 일본 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오미야는 사다의 사랑에 대해 미국식 재판을 통해 심판하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오오미야는 이런 성격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집에 있는 인물들의 캐릭터 역시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오미야의 집에 있는 요리사, 가정부, 악사, 집사 등은 모두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다. 서양식 집과 실내 장식, 서양식 식탁과 요리 등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닌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점은 오오미야가 심판을 청구하여 열린 재판정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검사와 판사 등도 모두 위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다. 또한 방청객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교복을 입고 붉은 장미를 입에 문 학생차림의 혼령들은 일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지만 입에 물려 있는 장미 때문에 말은 할 수없는 존재다.
이들은 일본이 전통적으로 간직해왔던 힘의 상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사다와 이시다가 결실을 맺기 위해 나누는 정사장면은 이들이 힘을 합쳐서 메고 가는 오미코시(神輿) 위에서 이루어진다. 원래는 오미코시를 메고 가면서 “왓소 왓소”를 외치지만 입에 물린 장미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일본의 죽은 힘인 것이다. 일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다를 받치는 힘이 바로 이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봐야 할 인물은 이시다이다. 그는 총 대신 사진기를 잡고 여인의 몸속에 숨겨져 있는 일본의 정체성을 담으면서 찾아내려는 인물이다. 그는 남녀가 몸속에 지니고 있는 성욕과 성행위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젊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성을 상대로 사진을 찍고 성적 욕망을 채우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1936년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 군인들이 중심을 이루는 군국주의를 거부한다. 일본의 정체성은 군국주의에 있지 않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다를 죽이려고 하는 군인들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일본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찾아내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시다는 아직 그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으로는 군국주의를 거부하지만 감성적인 내면에는 그것에 대한 향수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특별한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사진과 여체를 통해 무언가를 막연히 추구하는 그런 사람에 불과하다.
이것은 현재의 일본이 특별한 지향점이 없이 무작정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군국주의에 대한 지향점도 없고, 그렇다고 세계 평화에 대한 절실한 바람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엉뚱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생산적이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는 사진과 욕망의 해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성에 탐닉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젊은 여성을 모델로 하여 사진을 찍다가 자신도 알 수 없는 혼령의 부름에 의해 사다와 재회하고, 성적 욕망을 불태우다가 다시 성기를 절단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런 인물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군국주의의 망령에 빌붙어서 매춘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부인의 집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그곳은 이미 자신이 거부한 군국주의와 그것에 대한 향수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을 떠나 때와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다와 거리낌 없는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다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어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일본인이다. 다만 불타오르는 욕망의 노예가 된 자신을 꼼짝하지 못하게 묶어 두는 능력을 지닌 사다에게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이시다가 가진 캐릭터로서의 성격이 이렇기 때문에 사다가 탐닉하는 그의 성기는 크기는 크지만 빛을 발하면서도 아무런 생산 능력이 없는 물건으로만 그려진다. 본질은 죽어버린 상태에서 이시다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이지만 껍데기만 남아있어서 사다에게 결코 희망을 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시다의 성기가 된다.
1편의 마지막에서 무대 위에 나타났던 어른 남녀와 어린아이 중에서 여성과 여자 아이만 남고 사라졌던 남성처럼 언젠가는 자신도 사다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만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오오미야 교장이란 캐릭터가 서구화 된 일본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시다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일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라도 하고 있는 그런 인물이 된다. 그러므로 두 인물은 21세기 초에 일본이 직면한 사회적, 국제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스스로 서구인으로 치부하면서 아시아의 국가들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았던 일본이었지만 한국과 같은 신흥선진국들이 맹렬하게 추격해 오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강국의 재등장과 함께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제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아시아 나라들을 무시하고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본 사회 전체를 엄습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오오무라와 이시다라는 두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살펴볼 캐릭터는 어떤 경우에도 아시아를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일본의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주인공인 사다이다. 사다는 서구에서 들어온 현대식 윤리이념으로 무장한 오오미야와 함께 살면서 경제적인 부를 누리지만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그런 존재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인물이 바로 누드 사진 작가인 이시다였다. 그를 만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늘 향하고 있었던 일본의 정체성을 가능성으로나마 간직하고 있는 존재가 이시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이제 그녀는 한 조각의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오오미야를 떠나 이시다와 어떤 거리낌도 없는 상태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이시다의 누드모델이었던 여성을 끼어서 세 사람이 함께 성행위를 해도 아무런 부끄럼이나 죄책감이 없는 상태로 까지 된다.
그녀가 이처럼 대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성행위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이것을 통해 일본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불행은 이시다는 이미 일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 사다는 이시다의 목을 졸라 죽이고 성기를 잘라낼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일본을 만들고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사다는 70년 전에 잘라내서 간직했던 이시다의 성기를 자신의 몸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하얀 색을 가진 남성의 성기를 입으로 뱉어 낸다. 그녀가 입으로 뱉어낸 하얀 색의 성기는 바로 미국을 향해 창녀처럼 행동하는 오오미야 교장의 성기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오미야의 머리색과 마찬가지로 하얀 색을 띠고 있는 것이다.
사다의 이런 행위는 이시다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오오미야의 이념과 생활방식에 젖어서 살고 있었으며, 이시다와의 사랑을 통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갈색의 성기를 아래를 통해 몸으로 집어넣고, 위의 입을 통해서는 하얀색의 성기를 뱉어버리는 행위를 통해 물리적 의미의 일본은 이제부터 국적도 불분명한 미국화 된 정체성을 버리고 진정한 일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너무나 행복해진 그녀는 이제부터 진통을 통해 새로운 일본을 낳을 준비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산고의 동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이 아이가 바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21세기를 향해 전진할 일본의 모습이 된다.
따라서 사다가 법정에서 나오면서 아이를 안고 행복해 하는 장면으로 이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1편의 마지막에서 남자는 사라지고 성인 여성과 여자 아이만 남았던 불투명한 미래 따위는 이제 없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비전으로 무장한 진정한 정체성을 가진 일본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새롭게 태어난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가 결국에는 군국주의의 잔재인 이시다의 씨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불친절하고, 지극히 난해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희망찬 비전을 제시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줘도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