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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Jan 01. 2024

마당으로 나온 암탉

 똑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자고, 그리고 자고, 그리고 또 자고... 그렇게 침대에만 누워 있다보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곤 했다. 그럼 잠시 일어나 벽에 등을 지고 멍하니 앉았다. 어느 날 불현듯 마트에서 산 [비상구] 라는 팻말을 방문에 붙이고는 한 발자국 밖으로 발을 떼지 못한 채 동그나미 웅크린 채 숨죽이고 살았다. 그렇게 십 여년을 살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진공상태와 같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뭉뚱그려진 혼돈 상태가 계속됐다. 숨을 쉬는 것 말고는 살아있음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그 때, 느닷없이 나에게 소중한 인연 하나가 기적처럼 찾아왔다. 그 인연은 나에게 비상구를 열게 만들었고, 그렇게 삐꼼히 열린 문을 넘어서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내 부활의 첫 시작이었다.       


 동생이 갓난 어린아이를 낮 시간동안 친정에 맡겼을 때 내가 그 아이를 돌볼 거라고는 동생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가끔 누군가 집에 올 때에도 방안에서 나가지 않았던 나였고,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나에게 돌보아야 하는 누군가는 재앙과도 같았다.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예뻤다. 동생을 닮아 얼굴이 하얗고 눈썹은 그린 것처럼 뚜렷했다. 울거나 떼쓰지도 않았다. 엄마 흉내를 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유를 먹이고 함께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서투른 만큼 지극정성이었다. 기저귀를 갈아줄 때 단 한 번 물티슈로 닦아준 적이 없었다. 엉덩이를 항상 물로 깨끗이 씻고 보송보송하게 말려주었다. 동생이 수고비조로 주는 20만원으로는 아이가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좋아할 만한 선물을 샀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아이를 돌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돌봄을 받은 것은 바로 나였다. 아이와 함께 놀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다. 말 못 하는 아이는 나를 평가하지 않았고, 상처 주지 않았다. 아니 자신을 사랑하는 나를 또한 사랑해 주었다. 그 아이의 사랑이 나를 따듯이 품어주었고, 내 영혼은 아이에 기대 편안해졌다.      

 

 아이가 조금 자라 유치원에 갔을 때 하원을 하고는 집에 들르곤 했다. 그러면 아이가 올 시간에 맞추어 아파트 현관에 나아가 기다렸다. 드디어 유치원 버스가 모습을 드러내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양팔을 열렬히 흔들며 아이를 맞이했다. 나는 아이가 자신은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아마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차에서 내리며 환하게 웃을 때 그 아이보다 내가 더 행복하고 기뻤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치유되어 갔다.      

 

 아무 걱정 없이 아이와 웃고 노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아이와의 이별이 가깝게 다가올수록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져 갔다. 아이가 10살이 되고, 20살이 되었을 때, 그 애의 눈에 비칠 내 모습이 두려웠다. 나에 대한 아이의 믿음과 사랑이 실망과 무관심을 지나 혐오애 이르게 될 것이 분멍했다. 내 자리를 찾아야 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애썼다. 사회생활을 해 본 적 없이 나이만 먹어 아무 경험이 없었다. 자격증도 없었고, 지방 소도시에는 그나마 일자리 자체가 거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써주겠다고 하는 곳도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조가 극에 달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대형마트 숙녀복 코너의 점주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날씬한 미인형이었고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린 사람이었다.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녀는 나를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크게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어렵게 처음 만난 면접 기회였지만 역시 안되는 건가? 실망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뜻밖에 그녀는 별다른 군소리 없이 출근하라고 선선히 수락했다. 표정 관리 단단히 하고 감사하단 말을 하고 돌아섰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뭉게뭉게 꿈도 커졌다. 여기서 장사를 배운 다음 몇 년 뒤에는 내 가게를 내고, 열심히 옷을 팔아서 돈도 많이 벌어야지 싶었다. 그렇게 달걀은 닭이 되고, 닭은 소가 되고, 소는 집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장밋빛 꿈은 출근하자마자 무간도로 바뀌었다.     

 

 마트는 전쟁터이다. 같은 업종을 두 개 이상 입점시켜 매일의 매출을 비교하며 경쟁을 시킨다. 학교에서 받는 성적표와는 느낌도 다르고 압박도 달았다. 학교에서는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만 하면 중간은 갈 수 있었지만 마트에서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어 지갑을 열고 물건을 사게 해야 했다. 돈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단돈 만원이라도 어떻게든 꺼내게 하려는 사람이나 정말 가치있는 경우에만 돈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이나 팽팽한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그러나 장사는 손님을 붙들고 입씨름해서 물건을 사게 하고 승전보를 울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장사의 기초는 정리이다. 정리는 단지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리를 함으로써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무엇이 잘 팔리는 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얼마만큼 주문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물건을 알아야 권유도 할 수 있다. 하나를 사러 온 사람에게 두 개. 세 개를 팔 수 있고, 아이쇼핑을 하려고 온 사람에게도 덥썩 안길 수 있다. 기본에서 매출이 나오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첫째, 정리 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청소기 한번 제대로 돌린 적이 없고, 수건 하나 제대로 개킨 적이 없었다. 일을 시작했다고 갑작스레 정리정돈의 신이 될 리는 만무였다. 둘째, 대화 없이 십여 년을 지내온 내가 입을 열어야 한다고 느닷없이 달변가가 될 리 없지 않은가? 친구 사이에 이해관계 없이 떠드는 수다도 어려운 판국에 옷을 사고 돈을 내라는 말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뿐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부자는 있어도 갑자기 멋쟁이는 없다는 말이 있다. 방구석에 쳐박혀서 무슨 옷을 사고 입어봤겠으며, 남의 입성을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옷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총체적 난국일 뿐이다.     

 

 버티려 했다. 버티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는 3개월은 악몽이었다. 내가 어리버리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사방에서 보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비참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3개월 동안 버틴 것도 점주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그녀는 돈보다 우선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 파는 직원보다 사람 좋은 나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그녀 덕에 용케 짤리지 않고 월급을 받았다. 나름 열심히 했다. 근무시간에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야간에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정리도 해 보고, 이것저것 맞지도 않는 옷도 입어 보았다. 홈쇼핑을 열심히 보고, 녹음기를 사서 점주에게 손님을 응대하는 말을 녹음 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부질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나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견디다 견디다 결국 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장사를 못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성실하고 믿을만하다는 인정을 해주었다. 그들은 나에게 대체알바를 권유했다. 당시 마트에서는 직원들이 1주일에 하루를 돌아가며 쉬었는데 그때 일할 8시간짜리 알바를 구하곤 했다. 돈이 되지 않고, 일은 힘들어, 알바 구하기는 늘 쉽지 않았다. 망설이는 나에게 그들은 물건을 잘 파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비우지 않고 잘 지키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매출에 대한 부담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 시선을 덜 받을 수 있도록 8시간 알바가 아니라 4시간만 일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어했지만 나를 써주었다. 그렇게 여전히 매출은 꽝이었지만 이 점포에서 또 저 점포로 떠돌아다니며 겨우 숨을 이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여성들이었다. 엄마이고, 아내이고, 딸인 그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당당하게 경쟁에 참여하고 또 한몫을 해내고 있었다. 위에서 항상 채찍질을 해대기도 하지만 매출은 곧 그들의 수입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뒤편에서는 사람 사는 정 또한 있었다. 세상에는 높은 곳에서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엄청난 가치를 걸고 첨예한 경쟁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훌륭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여성들이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존경스럽다. 그들의 자신감과 인내심 그리고 생명력이 나는 언제나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매번 불안하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마트에 나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운이 트일려고 그랬는지 겨울이 가기 전에 내가 일했던 옆 점포의 점주 언니 소개로 그녀의 남편이 시작하는 대리콜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앉아서 전화만 받으면 되는 일이라는 데 솔깃했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나를 쓰는 이유는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약아빠지지 않아서 뒷통수 칠 것 같지는 않다는 흔치 않은 사유였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는 드디어 일을 하게 뒨 것이다. 그럼 그 이후는 드라마틱하게 풀렸을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진창에서 구르고, 때로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바보같이 계속 당하면서도 잘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웃기만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떨 때에는 떨리는 마음으로 벌벌 떨면서 버티고 싸워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애썼지만 뭐하나 제대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없고 이 나이 먹도록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다.     


 어제 아이와 동생내외가 집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벌써 훌쩍 자라 대학 3학년을 올라가는 아이는 캐나다로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세상에 나왔으니 나도 이제는 연식이 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어느 쇼핑몰의 고객센터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의 무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군소리 없는 성실함이다. 이쯤되면 성실함은 본성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가끔 매일을 전투처럼 살던 마트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곳에서 세상의 두려움을 배웠고 나에 대해 주제파악을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겸손을 배웠다. 그 소중한 경험으로 날 끼워주지 않는 세상에 그래도 머리를 들이밀고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간다. 세상에 소중한 내 인생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 선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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