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얀사자 Mar 25. 2024

산너머 저쪽에 행복이 있다고,

 그녀와는 반념이 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다. 끝난 인연인가 가끔 상실감에 젖기도 했지만 고집스레 연락을 안했었는데 그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어머님이 아프셨고, 혼란의 시기를 거쳐 결국에는 본인이 간병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담담히 전했다. 그동안 정신이 없어 연락 못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나는 너무 미안해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지혜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분명 재녀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에는 남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 희생해야 했고, 나이가 찼으니 결혼하나는 성화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아들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는 아버지에게 한 마디 말 없이 섭섭함을 참아야 했다. 


 그녀와 내 운명은 바로 남자 형제가 있는지 없는지에서부터 갈렸을 것이다. 없는 형편에 그녀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의 가방을 숨기면서까지 공부를 막았다. 그녀까지 가르칠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나에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라고 하셨다. 물론 그 하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뜻과 맞아야 한다는 함정은 있었지만 나에게는 분명 타고난 베네핏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나에게 남자 형제가 있었다면 아마 나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랑 바꿔 태어났다면 나는 절대 너처럼 살지 않았을 거야. 정말 내 꿈을 펼쳤을 거다.” 장난삼아 농담처럼 그러나 진심인 그녀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그녀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행복한 줄 알아!” 라고 말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행복한 것은 그녀였다. 하고 싶다고 마음 먹으면 뭐든 해내고,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숨어있는 그의 표리를 꿰뚫어 상대를 항복시킬 줄 알며, 기회를 포착하면 반드시 잡고야 마는 그녀가 너무 부럽고 좋아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숭배자였다. 


 그녀의 그런 재능을 타고난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나의 행동이나 선택이 타고난 내 기질에서 비롯된 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갖고 태어난 기질은 아이가 주어진 환경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는 한다. 아, 그리고 환경도 타고나는 것이긴 하다. 


 다만 아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그 시간에는 타고났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사이사이, 짧거나 아니면 긴 여러 모퉁이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두 마디의 단어에는 누구나 많은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있다.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져서 집을 그리워하며 돈이 생길 때마다 서울로 올라왔던 어린아이는 드디어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되자 사랑 받는 아이가 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했다.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는 딸이 되어야 했고,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집안의 기둥이 되었다.  


 내가 타고났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예민한 말귀는 어린 시절 뼈를 깍는 눈치를 통해 갈고 닦아온 것이고,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명철한 사리분별은 어머니를 돌보고 동생들을 이끌고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을 확고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한 그녀의 지난한 투쟁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결과였을 것이다. 


 소통이나 타협 보다 늘 혼자를 선택했던 내가 사회적응능력을 상실했던 것이 당연한 결과였던 것만큼 세상에서 갈고 닦은 그녀의 치열한 삶은 그녀에게 당연하게 강한 생존력을 부여했던 것이다. 


 어린 그녀가 다시 혼자 할머니 집으로 보내질까 조마조마하게 마음조리며 구석에서 애타게 부모의 눈치를 보기만 하는 대신,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던 예뻤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론 눈치는 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필사적으로.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늘 주도적이고 능동적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녀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고, 늘 빛나는 생명력으로 주위를 밝히는 사람이니까. 


 “초인에게도 피곤한 순간은 온다.”


 케빈스페이시가 나오는 negotiator라는 영화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의 말이라고 하는데, 그렇다. 초인도 피곤한 순간이 온다.


 그때였던 것 같다. 그녀가 부쩍 나와 바꾸어 태어났다면 달랐을 거라고 말했을 때. 나에게 계속 행복한 줄 알라고 말했던 그때, 그녀에게는 인생이 버겁고 힘들고 피로했던 것 같다. 그녀는 부쩍 함께 할 누군가를 찾았고, 아이들이 다 자라서 독립하게 되면 혼자가 될 자신을 두려워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아 홀홀단신이라는 내 처지를 부러워했고, 자신의 생각에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더라도 받아주는 집이 있는 내가 편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사랑받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징징거리는 나에게 주어진 나의 역할을 다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행복한 줄 알라고 진지하게 충고하기까지 했다. 


 우리 집은 너희 집과 다르고, 내 어머니는 너의 어머니와 다르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녀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녀의 말에 수긍하지도 않았다. 인생이란 각자에게 객관적안 것이 아니라 주관적일 뿐이다. .   


 노후를 함께 할 짝을 찾던 그녀가 이제 남동생이 빠져나간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 늙으신 두분을 모시고 산다는 이야기가 마음이 아픈 것은 그녀의 선택이 단순히 효심과 도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거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 대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하고 편안해 보였다. 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고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스스로 납득하고, 수긍할 수 있고, 가장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서 고향으로 내려올 때 나를 상담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생들도 다 떠났으니 이제 가서 혼자 부모 사랑 독차지하고 살아 보라고.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귀에 와닿지 않았다. 그리고 또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늘 말하듯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은 없다. 


 그렇지만 생각은 한다. 감정으로 느껴지는 사랑은 모르지만, 머리로는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은 드는 것이다. 분명 내가 그토록 원하는 소통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간혹 대화를 하게 되면 대개는 건성이고, 뻔히 아는 서로의 습관과 말투에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래도 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더라도 내 부모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사랑은 사랑이라고.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워 마음으로 빌었다. 이제 너도 부모 사랑 독차지하고 살아 보라고. 어린 시절처럼 마음조리고 눈치 보지 말고, 배짱부리며 어리광도 한껏 부려보라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그녀가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특별하다는 착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