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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사자 Jan 07. 2024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첫째, 내 수고를 모르는 자를 위해 한순간도 일하지 말라. 

 둘째, 내가 있을 자리는 내가 마련한다. 

 셋째,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     

 

야간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며 절치부심 내 뼈에 새긴 3가지 결심이다.      

 

 가혹한 곳이었냐구? 아니다. 억울했던가? 아니다. 오히려 사장님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고, 또 유일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감사하지만 감사해서는 안 될 어떤 한 사람을 나는 분연히 떨치고 결별했다. 계기는 사장님의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2년 동안 받았던 무수한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내 노력 그리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으로 비로소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주야로 일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외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일해야만 하는 동기이다. 유약의 끝을 달리는 내가 동기마저 뚜렷하지 않은 채로 야간아르바이트를 계속했던 데에는 물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십수 년을 불면증을 앓아왔고 약 없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어차피 그 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채울 다른 일이 없었고, 차라리 일이나 하는 게 낫다 싶었다. 더욱이 때마침 고관절이 아파 걷는 것보다 앉아 있어야 했다. 낮에도 밤에도 앉아 있는 게 건강에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프지 않아서 좋았다. 하필 시간도 딱 맞았다. 주간 일이 끝나면 도시락을 먹고 출근하면 시간이 딱 이었다. 일은 재미있었다.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즐겁게 일했다. 나는 그 일이 정말 좋았다.      


 그러나 그 모든 이유와 별개로 내가 그 일을 계속했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사장님은 차가 없는 직원을 퇴근할 때 집에 데려다주셨다. 이를테면 그 사무실의 사원복지라고나 할까. 물론 그 때문이라면 계속 일할 이유는 없다. 진짜 이유는 사장님의 거침없고 직설적이며 즉각적인 피드백 때문이었다.      


 오래 말하기를 즐기지 않았던 사람들은 말할 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고는 한다. 거기에 더하여 즐겁게 대화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말주변은 애초에 장착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그랬다. 스스로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남이 말 시키는 것도 기피하고... 과묵은 선택이 아니라 타고난 품성과도 같았다. 그런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이다. 사장님이 운전하는데 입 다물고 유유히 드라이브나 즐기며 퇴근하는 것은 짧은 생각에도 올바른 사회생활이 아니었다.      


 말은 일하는 것보다 더 큰 부담이고 스트레스였다. 흔히 말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말할 기회가 생기면 독백을 한다.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열심히 생각해서 준비한 이야기들을 듣거나 말거나 홀로 독백을 했다. 그러면 사장님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의 혀는 자주 날카로운 칼춤을 추었고 나는 그 칼날에 사정없이 찔리고 베었다. 그렇지만 상처에 굴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베인 상처를 치유하며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녹슬어 잘 돌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매일 같은 사람과 규칙적으로 대화할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말하기를 실전 연습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만약 여기서 버틸 수 있다면, 사장님과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되면, 이 사무실에 어우러져 녹아들 수 있게 된다면 내 인생은 퀀텀점프를 하게 될 거라고. 그래서 이 사장님을 딛고 다음번 스테이지로 화려하게 올라설 수 있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버티고 또 버텼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했던 것이 자랑이었던 내가 꼭 남에게 부탁을 해야하는 일이 생겼다. 가족이라도 안가르쳐주는 운전이었다. 그런데 부탁을 하면 열이면 열 댓가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뜻밖의 성과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우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가벼이 사장님에게 자랑스럽게 찐친을 주워섬겼나 보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나에게 깨진 항아리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깨진 항아리를 연못에 던지면 물이 차듯이 친구들이 깨진 항아리인 나를 품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그분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집에 도착해 내가 뭐라고 반박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장님은 그렇게 쌩하고 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그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장님의 이야기에는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운전을 가르쳐준 친구들에게 이전에는 개인적인 연락을 했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필요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연락해 그것도 운전을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다. 사장님이 꼬집은 것은 그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은 나에게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때 그 친구들은 부탁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꼭 손을 내밀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조건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서툴게 내민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울림이었다. 그리고 사장님 말대로 느닷없이 내 필요에 의해 무턱대고 손을 내민 것은 실례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화를 내는 대신 친구들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 후 나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수다 떨었다.      


 사장님을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혼자라는 걸 극도로 기피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나는 늘 혼자였고 또 혼자가 편했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둘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할 때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어울려 보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친해지지 않는 사무실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고 싶었고, 드나드는 사람들과 격의 없이 통하고 싶었다. 사장님도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하셨다. 그들은 새벽에 친한 사람들끼리 함께 밥을 먹곤 했는데, 그 자리에 초대를 해주신 것이다.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어야 친해질 수 있다고...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들과 어우러지지 못했다. 만날수록 서 있는 지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지향이 다르며,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친해지는 방법도 다르고, 말하는 대화거리도 틀렸고, 웃음포인트도 달랐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었다.      


 상담해 주시는 교수님이나 나를 잘 아는 친구에게 ‘내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하소연하면 그들은 ‘그래도 다가가라. 너만을 주장하면 안 된다. 때로는 손해도 봐야 한다. 그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충고하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럼 나는 혼란스러운 채로 꿔다논 보릿자루가 되곤 했다.     


 겉으로만 보면 대인관계가 없다시피 하는 내게 오라고 손짓하는 곳이 있으니 냉큼 달려가 예쁜 짓도 해가며 그 속에 녹아드는 것이 최선처럼 보일 것이다. 교수님이나 친구가 아니더라도 내 이야기를 듣는 모두가 아마 가서 잘해봐 라고 내 등을 떠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까마귀는 까마귀이고, 백로는 백로인 것이다. 누가 까마귀고 누가 백로라는 뜻도 아니고, 뭐는 좋고 뭐는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까마귀가 백로가 있는 곳에 있으면 튀는 것처럼 백로도 까마귀가 있는 곳에서는 이상할 뿐이다. 그냥 다른 것이다. 오히려 내가 대인관계가 능해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도 유쾌하게 스몰토크를 하며 밥 한 끼 술 한 잔쯤 문제없다 싶다면 즐거운 경험이 될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향성의 극I인 나에게 그들과의 만남은 가까워지기는커녕 늘 다름을 확인할 뿐이었다.     


 사장님과는 늘 미묘하게 삐걱댔다. 일을 하는 데 있어 사장님이 원하는 방식을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떳떳하고 원리원칙대로 일하고 싶었던 나는 늘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곤 했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서 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될 때에는 그곳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대로 일해야겠다고 결심도 했다. 글을 쓸 여가시간을 마련하고 싶어서 사무실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사장님에게 미안한 마음은 전하고 싶었고 사과하고 싶었다.       


 2년 가까이 일했지만 퇴직금은 받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2달간은 일한 시간이 적고, 코로나 때문에 사무실 형편도 좋지 않아 포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아마 아쉬웠나 보다. 슬쩍 퇴직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먼저 무안해서 웃으며 일찍 그만둘 껄 그랬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내가 퇴직금 받을 생각이 없다는 생각에 그는 안심한 것 같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알바시라면서요.” 그렇다. 나는 알바였고 알바라고 이야기했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준비해 왔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한 식구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 해야 했다. 어우러지지 못했던 데 대한 아쉬움, 사장님 때문에 늘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희망과 기쁨에 대해 그에게 감사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날쌔게 내 말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그 말을 다 기억한다면 나는 마음이 아파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내가 불성실했으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늘 짐만 되었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말미에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 만날 날이 아직 남아있으니 말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애졌다. 내 영혼이 갈갈이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겨우 그에게 그 동안 내가 내 식대로만 일했다고. 앞으로 어디선가 다시 일하게 될 때에는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마음으로부터 작별했다.      


 그는 언제나 입이 빨랐다. 말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하는 사람이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매일 집에 데려다주고 밥 먹는 데 초대도 하고 그로서는 직원을 품으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들인 직원은 그만두고 나간다면서 딴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가 나에게 던진 말이 꼭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꼭 의미를 담아 한 팩트폭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불성실한 사람은 아니다.) 작정하고 모질게 틈을 보아 나를 후려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잠시만 내 말을 가로채지 않았다면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진심을 담은 작별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솔직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무례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덕분에 성장했다고 감사했지만 사실은 그의 날카로운 혀에 무수히 베이고 찔려 피 흘리던 내가 스스로 그 상처를 보듬고 핥아 치유하기 위해 무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고군분투해 왔던 결과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직원에게 깨진 항아리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깨진 항아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떠나면서 흔히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나도 그 유종의 미 때문에 사직의사를 말하곤 진짜 열심히 일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씁쓸히 유종의 미란 떠나는 사람뿐 아니라 보내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장님은 우리의 이별을 내가 허튼 말로 망쳐버릴 것을 걱정해 선수를 쳐서 날쌔게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마법에서 풀려났다.       


 바람직한 마무리는 어떠했을까? 나는 그에게 감화를 받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정을 주고 또 받으며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을 것이다. 사장님과는 명절 때면 꼬박꼬박 인사를 하며 멀리서나마 응원하면서 은혜를 아는 개구리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엉뚱하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려 애쓸 필요는 없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흘러가도록 두면 된다로 끝이 났다. 현실이란 대개는 바람과는 다른 것이다.      

 아름다운 이별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그는 떠나는 나에게 어떤 미련이나 감정의 찌꺼기를 남기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는 내 인생을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진짜 인연이었고 귀인이었다고. 그를 만나 서툴지만 말연습도 해보고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가 주는 돈으로 글공부도 했고, 관계를 결론지어 매듭을 짓는 경험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떠날 수 있도록 그가 북돋은 것은 나의 자의식이었고, 자존감이었다.      


 소중하고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찰라의 한 순간. 좋았으면 추억이고, 나빴으면 경험이라고 한다. 굳이 말하라면 좋은 경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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